칼럼

건강불평등과 자연인

[서평] 콜린 레이스, 리오 패니치,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편자), 자본주의의 병적 징후들, 후마니타스. 2018

케이블TV에서 하는 방송 중에 < 나는 자연인이다>는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습관적으로 TV 리모컨 버튼을 누르다 보면 70개가 넘는 케이블 채널 여기저기서 산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자연인과 심심찮게 마주친다. 40대 이상 남녀 시청자에게 인기가 높다고 하는데, 실제로 주변에서 이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이런 방송이 대개 그렇듯이 회당 60분이라는 시간 동안 비치는 자연인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거의 비슷하다. 중·노년 남성(어쩌다 아주 드물게 여성 자연인이 나올 때도 있다) 자연인이 인적 드문 산속에서 혼자 먹을 만큼의 채소를 기르고, 배낭 메고 산속을 돌아다니며 칡이나 더덕도 캔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희귀한 버섯을 따거나 귀한 약초를 캘 때도 많다. 생업의 고단함에서 벗어나 인간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자연인을 모습을 보다 보면 가끔 ‘저렇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라는 시답잖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때때로 암 투병 중인 자연인이 출연한다. 병원에서 더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의학적 판단을 내렸음에도 산속에 혼자 살면서 암을 완치하거나 건강을 회복했다는 사연은 흥미롭다. 암이 완치됐다거나 건강이 더 좋아졌다는 자연인의 말을 입증할 의학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심지어 담도암으로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고 죽을 생각으로 산을 찾았다가 그대로 눌러앉아 살다 보니 어느새 암을 완치했다는 자연인도 있었다.

그런데 오죽했으면 깊은 산중에서 나 홀로 삶과 투병을 선택했을까. 산속 생활이 좋아서 선택한 자연인은 드물었다. 대개 사업실패나 실직, 이혼, 사회생활 부적응 등의 사연을 품고 있었다. 아마도 경제적인 이유로 산속에서의 삶이나 투병을 하게 된 자연인도 많지 않을까 싶었다.

어쨌거나 방송에 등장하는 자연인들은 산에 들어와서 건강을 되찾았다고 확신하는 듯 보인다. 산속에서 좋은 공기를 마시고, 신선한 먹거리를 섭취한 덕에 병도 낫고 더 건강해졌다는 믿음은 거의 신앙에 가깝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버스 운전으로 인한 스트레스, 자살 시도 등으로 도시에서의 삶을 정리하고자 했던 어느 자연인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립선암 진단까지 받았다가 산속에서 생활하며 건강을 되찾았다고 하니….

이런 자연인들에게 건강불평등의 사회구조적 요인은 무의미하다. 사업 실패나 실직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에 때문에 적극적인 치료를 받지 못했거나 치료를 포기했던 어쨌든 간에 이들에게는 건강에 관한 모든 게 오롯이 개인의 책임이다. 최근 정부가 발의한 개헌안에 국가가 보장해야 할 국민의 기본권으로 건강권을 신설하는 조항이 포함됐다는 걸 알았다면 자연인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세상에 국가가 그걸 왜?”

자연인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오늘날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한 건강불평등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분명한 사실이다. 그에 대한 증거는 차고 넘칠 정도다. 대표적인 건강 지표인 기대수명을 보자. 통계청이 작년 말 발표한 ’2016년 생명표’에 따르면 2016년에 태어난 출생아 중에서 남자의 기대수명은 79.3년, 여자는 85.4년이다. 이런 기대수명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보다 남자는 1.4년, 여자는 2.3년 더 높다. 1936년 당시 한국인 평균수명이 42.6세(남자 40.6, 여자 44.7세)였던 것과 비교하면 2배 가까이 늘었다.

다만 평균값에는 언제나 함정이 있다. 산술적으로는 딱 떨어지지만, 그 집단의 구성원에게 제각각 대입해보면 뭔가 현실적이지 못할 때가 많다. 많은 직장인이 평균 임금 통계 속 숫자를 보면서 느끼는 괴리감과 비슷할 듯싶다. 2016년을 기준으로 한국인의 평균 기대수명이 82.4년이라고 하더라도 국민 제각각의 기대수명은 큰 편차를 보일 수밖에 없다. 각종 사고나 질환, 자살로 인한 갑작스러운 생의 마감이란 변수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는 기대수명의 격차에 또 다른 변수가 작용한다는 게 뚜렷하게 확인됐다. 바로 사는 동네와 소득 및 교육 수준, 고용 정도, 주거 및 생활환경 등이다. 한국건강형평성학회가 전국 17개 광역시도와 252개 시·군·구 별로 건강불평등 현황을 정리해 제작한 ‘지역별 건강격차 프로파일’을 보면 사는 곳과 소득 수준에 따라 기대수명이 최대 10년 이상 차이가 났다.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평균수명 중 건강하게 삶을 유지한 기간을 의미하는 건강수명의 격차가 소득 수준에 따라 최대 23년이나 차이가 났다.1) 세상에나!

이런 건강 격차가 생긴 원인이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지역별로 분포한 의료자원의 불균형, 소득 수준에 따른 미충족 의료비율 격차 등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도시와 수도권 중심의 의료자원 분포, 전체적으로 고소득층에 집중된 의료이용 양상이 건강불평등을 가속화 한다. 앞선 많은 연구를 통해 건강불평등이 소득과 교육 수준의 격차, 고용 정도, 주거 및 생활환경과 같은 사회구조적 문제에 기인한다는 게 거듭 확인됐다. 상황이 이런데도 건강불평등 문제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바닥을 헤매고 있다. 건강불평등을 단호하게 부정하거나 도저히 추측하지 못하는 경우는 박탈지수가 높은 지역의 거주자한테서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연구결과는 이를 방증한다.2)

건강불평등이 좀처럼 사회정치적 의제로 떠오르지 못하는 가운데 가난하고 아픈 이들에게 병원은 ‘하얀 정글’로 변했다. 당뇨병을 앓으면서도 단돈 몇만 원이 없어 병원에 다니지 못하다가 결국 합병증으로 소변줄을 달고, 최소한의 생계수단마저 잃게 된 사람에게 의료시스템은 무용지물이다. 이런 가운데 규제 완화와 작은 정부, 시장의 원리에 기반을 둔 신자유주의적인 보건의료정책은 기승을 부리고, 건강에 대한 책임을 개인화하는 경향은 점점 심해진다. 건강 책임의 개인화는 국가가 책임져야 할 기본권으로써 건강권에 대한 인식을 교묘하게 가린다.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산속에 들어가 암을 치료했다는 자연인의 삶에 대한 환상을 품게 만든다. 아직도 건강불평등의 정책 의제화는 갈 길이 멀다.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한 건강 문제를 정치·경제학적 시각으로 들여다본 < 자본주의의 병적 징후들>(콜린 레이스·리오 패니치 지음,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 편자, 후마니타스 펴냄)은 건강불평등 문제의 심각성을 훨씬 더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6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만큼이나 만연한 신자유주의가 건강과 의료를 어떻게 상품화하고, 국가의 책임을 시장 원리에 맡김으로써 건강불평등이 어떻게 심화하는지를 여러 국가의 사례를 통해 꼼꼼하게 살폈다. 시장의 효율성에 대한 지독한 믿음, 출산과 죽음에 이르는 모든 생애 과정의 의료화 틈새를 파고든 건강의 상품화, 더 많은 부의 축적을 위해 공공의료 체계를 흔드는 보건의료 산업 자본의 교묘한 행태를 낱낱이 들춰냈다. 이를 통해 보건의료 영역이 자본주의의 거대한 투전판으로 변했음을 경고한다.

오늘날 전 세계 곳곳에서 자본주의의 병적 징후들은 차고 넘친다. 1945년 이래 보편적 보건의료 체계를 건설했던 서유럽 국가의 의료체계가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장 중심의 보건의료 체계로 다시 전환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신자유주의와 그로 인해 초래된 세계적인 경제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건강 및 보건의료 부문에서 생겨난 ‘병적 징후들’을 더 선명하게 부각하고 있다. 단지 ‘비용 절감과 효율성’이라는 시장의 논리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이미 유럽 선진국에서조차 가난한 사람들의 기대 수명이 부유한 사람들에 비교해 10년에서 20년까지 짧은 것으로 나타났다.

신자유주의 본산지인 영국에서는 ‘비용 절감과 효율성’이란 아젠다가 보건의료 영역에서 주도권을 틀어쥐고 보편적 보건의료를 상품화하는 첨병 역할을 한다. 특히 보건의료 영역에서 급증하는 의료비를 어떻게 절감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집요하리 마치 집착한다. 인구의 고령화와 함께 첨단 의료기술이 끊임없이 등장하면서 보건의료에 대한 수요가 무한정 늘어날 것이란 전망은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을 준다. 공공부문의 지출은 한정돼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는 우려는 비용 절감과 효율성이 의료비 급증에 대응하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이 때문에 비용 절감과 효율성은 보건의료 영역의 정책을 결정하는 방향타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 민간 공급체계를 더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맹신하게 만든다.

“1980년에서 2000년까지 미국의 영리 및 비영리병원, 요양원, HMO, 가정간호기관, 투석 센터 등을 비교한 132개 연구 결과를 종합한 결과, 비영리 기관이 영리 기관보다 비용 효율성이나 질적인 면에서 더 우월하다고 조사됐다.(중략) 보건의료 제공에서 영리 행태가 비영리 행태인 공공의료보다 더 (비용) 효율적이라는 주장 또는 가정은 시장 옹호론자들이 주장하는 경제 이론과도 모순된다. 흥미로운 일례로서, 영국 재무부가 2003년에 공공서비스의 생산성을 공공 선택 이론에 근거해서 분석한 바 있는데, 그 결과에 따르면 보편적5 보건의료를 공급하는 데 있어 시장은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자본주의의 병적 징후들> 50~51쪽)

미국이 민간 의료공급체계가 주도하는 보건의료 시스템을 갖췄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빚어지는 건 아니다. 영국의 사례를 보면 비용절감과 효율성이 국민건강에 큰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위험한 유혹인지 알 수 있다.

영국 미들랜드에 있는 스태퍼드 병원에서 2005년부터 2008년까지 4년간 부실한 진료와 의료진의 방치로 인해 최대 1200명의 환자가 사망했다는 ‘스태퍼드 병원 진상보고서’는 보건의료 영역에서 비용절감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정책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다시금 깨닫게 했다.3) 그뿐인가. 2015년 4월부터 2017년 3월 사이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 산하 병원 임산부 관리(매터니티 케어) 의료팀의 부주의나 실수로 산모 또는 태아 288명이 목숨을 잃었다.4) 두 가지 사례 모두 병원이 NHS에서 요구하는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무리하게 의료 인력과 재정을 감축한 게 주요 원인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난 10년의 보수정권 집권 시기에 한국에서 추진된 보건의료 영역에서의 규제 완화 정책을 되짚어 보면 된다. 비용 절감과 효율성이란 구호를 앞세워 보건의료 영역에 가해진 수많은 규제 완화 시도가 환자안전을 도외시한 저급한 의료상업화의 일환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보건의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은 의료자본의 수익 추구를 정당화하는 것도 모자라 의료공공성이란 명분을 부여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특히 거대 글로벌 제약사들은 자신들이 신약의 연구개발과 임상시험에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강조하며, 신약개발을 통해 마치 자신들이 ‘인류의 구원자’인 양 행세한다고 이 책은 꼬집었다.

실제로 최근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리피오돌’이란 의약품의 공급중단 논란을 보면 그런 지적이 과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간암 환자 등에게 사용되는 경동맥화학색전술(TACE) 치료제 ‘리피오돌’을 국내에 독점 공급하는 프랑스 제약사가 한국 보건당국을 향해 건강보험 약가를 인상하지 않으면 더는 이 약을 더 공급하지 않겠다는 경고를 보냈다. 이 제약사는 리피오돌 한국 공급가가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라고도 강조하며 무려 5배의 인상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국내에서는 보건당국이 적정 보험약가를 인정하지 않은 탓에 애꿎은 환자들만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민간보험사가 판매하는 보험상품에 건강관리서비스를 접목한 ‘헬스케어’ 산업이 활성화되면 국민 의료비 부담 감소와 새 일자리 창출이 가능할 것이란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행태는 수익 추구에 눈먼 거대 제약사와 헬스케어 기업들의 전형적인 마케팅 수법에 다름 아니다. 거대 자본을 앞세운 글로벌 제약기업은 보건당국이 최신, 혹은 독점 공급하는 의약품에 적정한 보상을 하지 않음으로써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이 의학 진보의 결실을 누리지 못하도록 가로 막는다는 비난에 직면하게 만듬으로써 자신들의 가격 인상 논리를 견고하게 합리화한다. 환자를 인질로 삼아 의약품의 가격을 인상하려는 거대 제약기업의 노력은 결국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류의 구원자’가 아니라 가난한 환자들로부터 질병 치료의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건 두말할 나위 없다.

질병과 건강의 상품화를 통해 거대한 부를 축적한 보건의료산업 자본의 탐욕은 끝이 없다. 더 많은 수익추구를 위해 환자와 의사의 관계마저 공급자와 상품 구매자의 관계로 전락시켰고, 건강과 질병의 상품화를 초래했다. 이로 인해 환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은 사라지고 질병만을 대상화해 ‘환자의 역사’를 ‘질병의 역사’로 바꿔버렸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질병과 건강의 상품화가 사회경제적 요인에 따른 건강 격차를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점이다. 병원들은 더 많은 돈(의료비)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을 위한 차별화 된 의료서비스 제공에 눈을 돌린다. 대기업 자본이 투자한 대형병원의 과감한 시설 투자는 고급 의료서비스 수요라는 새로운 의료시장 경쟁을 촉발하고 있다.

더는 환자와 의사가 신뢰를 기반으로 한 관계가 아니라 상업적인 계약관계라는 인식을 심었다. 그 속에서 환자는 상품화된 의료를 구매하는 고객일 뿐 더는 돌봄이 필요한 환자로서 인식되지 않는다. 이런 구조 안에서 건강불평등 문제가 더는 끼어들 틈이 없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인 의료정책으로부터 야기되는 건강불평등이라는 심각한 병적 징후를 예방하는 가장 강력한 예방 백신은 바로 건강불평등을 현실의 문제로 직시하고 그 심각성을 인식하는 일이다. 이를 통해 건강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국가의 정책적인 노력을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곳곳에 만연한 신자유주의의 병적 징후를 치료하는 최고의 처방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의료와사회 2018년 봄호(통권 제9호) / 김상기 (라포르시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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