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경제위기시 필요한 정부의 건강 정책

위기의 폭과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다. 일부는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보다 많은 이들은 그러한 예측은 ‘기대’일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미국발 신용위기로 시작된 경제위기는 당분간 전지구적 삶의 양태와 행동을 좌우할 가능성이 높다.

경제위기는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문제는 가계 소득 감소, 자산 가치 감소, 일자리 문제 등일 것이다. 하지만 경제위기의 영향은 경제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경제위기는 다양한 부문에 영향을 끼친다. 건강도 예외가 아니다.

건강은 다양한 사회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다양한 사회적 요인의 변화에 따라 건강이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급격한 사회 변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많은 경제위기시에 건강도 그 영향을 받는다.

역사적 사례를 통해 경제위기와 건강과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들에 의하면, 경제위기시에 민중의 건강은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고 한다. 경제위기로 인한 건강 영향의 결과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경제위기가 민중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국가별, 계층별로 다를 수 있다. 한 나라의 사회문화 체계와 사회 정책 구조에 따라,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정부가 어떠한 정책을 펴는지에 따라 해당 국민의 건강 상태가 결정된다.

보건의료 부문의 재정 지출 감소는 파괴적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많다. 경제위기가 닥치면 각 국가 정부는 세입 감소, 실업 등에 따른 사회보험료 수입 감소 등 때문에 보건의료 재정을 감축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정부 지출과 보험 지출을 줄이고 그 빈 공간을 민간 자본으로 해결하라는 ‘악마의 유혹’에 귀 기울이는 순간, 국민의 건강 수준은 나락에 빠진다. 대부분의 경우 경제위기시에 민간 자본은 적던 크던 외상을 입기 마련이다. 이와 같이 상처 입고 탐욕이 극대화된 ‘뱀파이어’에게 국민의 건강을 맡기는 순간, 자본은 당장 국민들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아직까지 보건의료 관련 예산 감축에 대한 계획은 밝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작금에 논의되고 있는 영리병원 허용 등 의료민영화 추진 계획은 절대 경제위기시에 추진할 정책이 아니다.

환율 변동에 따라 의약품 및 의료기기 가격을 올리려는 요구가 있을 수 있는데, 정부와 보험자는 이러한 제약 회사 및 의료기기 회사의 요청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보험 재정 안정을 위해 경제위기시에는 오히려 보다 적극적으로 의약품 및 의료기기와 관련된 재정을 절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의약품 및 의료기기에 지출되는 재정은 낭비적 요소가 많다. 이 부분에서 새는 재정을 적극적으로 막아야 한다. 그런데 현재 이명박 정부는 기존의 의약품 재정 절감 정책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는커녕 뭉개고 있고, 과잉 공급되고 있는 의료기기 규제 방안은 만들 생각도 없다. 도대체 이 난국에 건강 살림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지 모를 일이다.

경제적 위기로 인해 줄어든 수입 때문에 개인이 의료기관 이용을 줄이는 사태는 결단코 막아야 한다. 경제위기 이전에도 우리나라의 의료 서비스 이용에 대한 경제적 접근성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비급여를 포함한 높은 본인 부담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의료 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제적 접근성 감소 문제는 경제위기시에 더 커질 수 있다. 실업, 가계소득 감소, 자산 가치 감소 등은 가처분 소득의 감소로 이어지고, 이는 가계지출에서 의료비를 줄이려는 경향으로 나타나게 된다. 만일 이러한 예측이 광범위하게 현실화된다면 그 영향은 파괴적이 될 것이다.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면 장기적으로 질병 유병률의 증가, 만성질병의 합병증 증가, 감염성질환에 대한 약제저항력의 증가 등이 초래된다. 의료비로 인한 가계 파산 문제는 상황을 더욱 더 악화시킨다. 그러므로 정부는 경제위기시에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 이전에 존재했던 의료 이용에 대한 경제적 장벽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이 영역에 있어서도 무얼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만일 재정의 어려움 때문에 오히려 본인 부담을 올리려는 정책을 편다면, 이는 완전히 거꾸로 가는 정책이다.

실업률의 증가, 생활 조건의 하락, 위기로 인한 스트레스의 증가 등은 약물 중독이나 음주 등 불건강한 생활습관이나 건강 행태를 가지게 할 수 있다. 현재 생활습관이 약간만 변하더라도 그것이 누적되면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영향이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싸구려 패스트 푸드 소비량이 증가하거나, 음주율와 음주량이 증가하거나, 흡연율이 증가한다면, 민중의 건강은 나빠질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소득 감소로 인해 자가 운전율이 낮아지고 대중교통 이용률이 높아지면, 육체적 활동량이 늘어나고 사고가 감소함으로 인해 건강이 좋아질 수도 있다.

자살 문제도 심각하다. 많은 연구들에 의하면 경제위기시 자살률은 증가하는 경향이다. 우리나라는 경제위기 전에도 자살률 1위인 국가였다. 경제위기시에 적절한 사회정책이 추진되지 않는다면 자살은 더욱 늘어날 가능성이 많다.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우울증 치료 정책은 자살 예방 대책이 아니다. 사회적, 구조적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개인이건 국가건 마찬가지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경제위기라고 해서 정부가 국민 건강을 위한 지출을 감축하고, 적절한 정책을 펴지 않는다면, 국가의 장기적 발전 전망은 더욱 어두워질 수 있다. 그러므로 경제위기일수록 건강에 돈을 써야 한다. 값비싼 의약품이나 의료기기 등에 낭비되었던 지출은 적극적으로 줄이고, 꼭 필요한 건강 지출은 오히려 늘려야 한다. 그래서 이 위기를 ‘건강하게’ 헤쳐 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경험적 진리를 이명박 정부만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상윤(건강과대안 상임연구원) / 건강세상네트워크 웹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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