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GMO] 조선일보, 몬산토 CEO 휴 그랜트 인터뷰 기사

식량난의 ‘희망’인가 ‘GMO<유전자 변형 농산물> 장사꾼’ 인가




세계적 농업생명공학 기업 몬산토
휴 그랜트 CEO의 열변 혹은 변명
기름 만지던 회사, GMO 種子에 올인… ‘뿌린만큼 거둔 대박’



“몬산토는 곡물 부족에 따른 기근이 미래에 닥칠 것을 예언한 기업이다.”(잭디시 세스·에모리대 경영대학원 교수)

“몬산토를 믿어서는 안 된다. 몬산토가 환경과 영세농을 돕는다는 말은 거짓이다.”(마리-모니크 로뱅·프랑스 탐사보도 저널리스트)

세계적인 농업생명공학기업 몬산토(Monsanto)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회사도 드물다. 몬산토는 외부 환경 변화에 맞춰 핵심 사업을 발 빠르게 전환한 ‘변신의 귀재’로 경영학자들에게 칭찬받는다. 하지만 환경 단체들로부터는 ‘프랑켄슈타인 푸드’, 즉 유전자 변형 농산물(GMO)을 만드는 위험한 기업으로 비판받는다.

몬산토는 1901년 코카콜라에 사카린, 카페인을 납품하는 식품 첨가물 제조업체로 출발했다. 1917년 아스피린 제조에 성공하면서 제약업에 진출했고, 산업용 기초화학제품(황산 등)과 제초제 등으로 발을 넓혀 종합화학회사로 변신했다.

1993년 이 회사는 미국 5위의 종합화학기업으로 우뚝 선다. 그러나 경영진은 엉뚱하게도 180도 방향 전환을 모색한다. 신(新)성장동력이라며 바이오 분야를 집중 육성하는 대신, 화학 분야는 줄여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장사가 잘되던 식당이 어느 날 갑자기 메뉴를 바꿔 새로 영업에 나선 셈이다. 1980년대 오일쇼크를 계기로 석유화학 분야의 성장에 한계가 있을 것임을 내다본 결정이었지만, 당시로선 도박과도 같았다.

그런데도 멋지게 성공했다. 지금 이 회사는 세계 최대 종자(種子) 회사가 되어 시장점유율 23%를 자랑한다. 몬산토의 주력 상품은 종자 중에서도 유전자 변형 농산물 종자이다. 말 그대로 유전자를 조작해 악천후나 병충해에 잘 견디고 수확량도 늘어나게 만든 종자이다. 자연에 없던 종자를 만든다고 해서, 안전성 논란이 끊이지 않는 품목이다(몬산토사의 용어로는 생명공학 종자(biotech seeds)이다).

몬산토는 뜨거운 논란 속에서도 시쳇말로 ‘대박’을 터뜨리고 있다. 농업생명과학 응용을 위한 국제사업단(ISAAA) 통계에 따르면, 현재 한반도의 5배가 넘는 면적에서 GMO 종자로 농산물을 재배한다. 1996년 GMO가 첫 등장했을 때에 비해 73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그 덕분에 2003년 49억달러(약 6조원)였던 몬산토의 매출은 지난해 113억달러(약 14조원)로 2배 넘게 뛰었다. 순이익도 20억달러(2조4850억원)에 달한다. 비즈니스위크지(誌)는 지난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대 기업에 몬산토를 포함시켰다.

그러나 이와 함께 NGO(비정부기구)들의 비판도 점점 거세지고 있다.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았고, 생태계를 교란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종자 시장에서 몬산토의 독점적 지위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다. 몬산토의 세계 GMO 종자 점유율이 80%를 넘기 때문이다.

몬산토는 과연 미래를 내다보면서 세계 식량난을 헤쳐나가는 혁신 기업인가, 아니면 세계 환경을 해치는 거대 독점 기업인가?

올여름 직접 찾아가 본 몬산토 본사의 풍경은 이 회사를 둘러싼 거센 논란과는 동떨어지게 너무도 평온했다.

미국 중부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이 회사 본사는 공원처럼 녹색 잔디가 온통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붉은색 벽돌 건물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고, 건물 사이로 캐주얼 차림의 직원들이 오갔다. 대학 캠퍼스 같은 분위기였다.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의 휴 그랜트(Grant·사진) 몬산토 CEO(회장)는 조촐한 집무실에서 기자를 맞았다. 장식 없는 흰 탁자에, 딱딱한 금속 의자가 놓여 있었다. 실험실이나 연구실 같은 느낌을 주는 공간이었다.

“GMO는 이전엔 이론에 불과했지만, 이젠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의 말투 역시 과학자를 연상시켰다(그는 경영학과 농학 석사 학위를 갖고 있다). 필요할 때는 수치를 인용하고 메모도 해가면서 기자에게 근거를 제시했다.





몬산토는 경영계에서‘변신의 귀재’로 벤치마킹 대상이다. 한때 미국 5대 종합화학기업이었지만, 오일쇼크 이후 농업생명과학을 신성장동력으로 육성하면서 화학 부문은 줄여나갔다. 사진은 몬산토가 개발한 GMO 옥수수, 면화, 토마토(왼쪽 위부터 차례로)와 GMO 옥수수 밭(오른쪽). / 몬산토 제공
휴 그랜트(Grant) 몬산토 회장은 이번 인터뷰가 ‘창과 방패의 대결’이 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했던 듯했다. 다른 인터뷰에서도 많이 경험했을 테니까.

기자는 유전자 변형 농산물(GMO)의 안전성과 몬산토의 독점 논란 등 시종 공격적인 질문을 퍼부었지만, 그는 미소를 잃지 않고 여유 있게 자신의 방어 논리를 차근차근 펴나갔다.

첫 질문은 부드럽게 시작했다.

―노 타이 차림이시군요. (그는 푸른색 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나왔다.) 회사 전체가 타이를 매지 않나요?

“모든 국가에서 타이를 매지 않습니다. 10년 정도 됐어요. 타이를 맨 고객을 만날 때만 빼고요.”

―10년 전? 무슨 계기가 있었습니까?

“글쎄요.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군요. 하지만 그 즈음부터 생명공학 쪽으로 사업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는 1981년 몬산토에 입사해 2003년 CEO에 올랐다. 미국에선 그리 흔하지 않은 ‘한 우물’ 형이다.

―그때부터 회사 문화도 많이 바뀌었습니까?

“예. 그때 즈음부터 우리가 일하는 방법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무엇보다 연구 인력과 경영관리 파트의 직원들이 함께 모여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많은 기술 중심 회사들은 연구 인력과 경영 인력이 따로 근무하고, 별로 교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위계 서열이 뚜렷하죠(경영관리 인력이 주도권을 잡는다는 의미).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아요. 두 분야 인력이 동등한 자격을 갖습니다. 그 결과 대화가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저희 회사는 많은 의사 결정이 팀 단위로 내려집니다. 지금 이 회의실에 6개의 의자가 있죠? 이것은 대부분의 결정이 5~6명이 모인 가운데 내려지기 때문입니다. 생명공학 전문가, 경영관리 담당, 규제 담당, 마케팅 담당, 변호사 등이죠. 앞으론 이런 협력이 더욱더 많이 일어날 겁니다. 현재 2만2000여명의 직원 중에 절반 정도가 입사 3년 이하의 젊은 직원들인데, 이들은 이과(理科) 전공인 경우가 많고, 격식을 따지지 않으며, 협력하는 문화에 익숙합니다.”

―팀 단위 의사 결정의 예를 든다면?

“3~4년 전쯤 일인데, 우리는 100만 달러를 아프리카 말라위에 기부했습니다. 국가에 기부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이 일을 담당했던 팀은 매우 젊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팀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해 이 팀이 스스로 의견을 바꾸더군요. 그냥 일회성으로 돈을 기부해 사라지게 하는 것보다, 종자(種子)를 기부하는 편이 낫겠다는 것이었습니다. 3년째가 되자 그 팀은 가뭄에 강한 종자를 만드는 계획을 입안했어요. 그리고 몬산토가 기술을 지원하고, 집행비는 외부에서 지원받는 계획을 만들어 빌 앤 멜린다 재단(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가 만든 자선재단)에서 4500만달러를 지원받았습니다.

올해, 그 계획이 시작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요한 결정을 내린 것은 제가 아니라 그 팀이었습니다. 최고경영자인 저라고 해도 그런 아이디어를 멈추게 할 권한은 없다고 생각해요.”

아프리카 이야기가 나오면서, 화제는 자연스럽게 식량 위기로 옮아갔다.




휴 그랜트 몬산토 회장
■유전자 변형 농산물 논란

―작년에 전 세계적으로 곡물 가격이 급등했습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작년 같은 식량 위기가 다시 찾아올까요?

“(잠깐 생각하면서) 음….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잠깐만요. 이 문제는 한 차원 위에서 바라보면서 설명 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메모지에 ‘농업(agriculture)’이라고 적은 뒤 계속 뭔가를 써내려 가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식량 위기를 이야기하셨는데, 농업에는 사실 그보다 많은 여러 가지 이슈들이 있습니다. 식량, 에너지, 물, 기후 변화, 그리고 아프리카…. 큰 변수들만 꼽아봐도 이렇습니다.

이 가운데 식량 문제를 먼저 꺼내셨는데, 두 가지 변수가 식량 위기를 좌우할 겁니다. 하나는 곡물 가격이고, 또 하나는 식량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가용성(availability)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둘 다 사정이 좋지 않아요. 곡물 가격은 최근 내리긴 했어도, 언젠가는 오를 가능성이 큽니다. 중국과 인도를 비롯한 개발도상국들의 단백질 소비량이 늘어나고 있거든요. 지금부터 2050년까지 요구되는 식량 생산량은 지난 1만년간의 생산량과 비슷한 수준이 될 겁니다. 가용성도 마찬가지예요. 이것은 가격이 어떤가에 상관없이 계속 나빠지고 있습니다.

에너지 문제도 농업에 영향을 미칩니다. 바이오 연료를 사용할수록 식량에 쓸 곡물은 점점 줄어들 테니까요. 물 역시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사용되는 물의 70%가 농업에 소요됩니다. 나머지 30%로 공장을 돌리고, 커피를 만들고, 콜라를 만들고, 수영장을 채우죠. 그러니 물 부족 현상에서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는 것은 바로 농업입니다. 기후 변화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불행히도 우리가 이 문제 중 하나만 떼어내 풀 수 없다는 점입니다. 선진국은 어느 정도 대처가 가능하겠죠. 하지만 아프리카는 어떨까요? 제가 보기에 가장 큰 문제는 아프리카에 닥칠 겁니다. 세계는 확실히 더워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아프리카는 가장 빠르게 더워지고 사막화되고 있습니다. 물 문제 역시 세계 평균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여기에 식량 가격까지 올라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목소리도 조금 높아졌다.

―몬산토의 유전자 변형 농산물(GMO)이 이런 문제를 풀어주는 해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반드시 우리만 옳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수확률(경지면적당 수확량)을 올릴 때라고 생각합니다. GMO를 통해 앞으로 20년간 수확률을 두 배로 올리는 것이 저희의 목표인데, 그렇게 되면 식량의 가용성과 가격 문제를 어느 정도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GMO의 안전성을 따져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고, 일부에서는 몬산토를 ‘프랑켄슈타인 푸드를 만드는 회사’라고 부릅니다.

“음…. 1996년에 우리가 처음 GMO를 내놓았는데, 그때 우리가 만났더라면 대화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겁니다. 그때는 ‘만약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으세요(What if?)’라는 문답이 오갔겠죠. 모든 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고, 이론에 불과했을 테니까요.

그런데 우리의 종자로 재배한 경작지를 지난 13년간 누적해서 합산해 본다면 20억 에이커가 넘습니다. GMO는 더 이상 이론이 아닌 현실입니다. 1996년 GMO 경작지는 미국에만 있었지만, 이제는 미국보다 인도에서 더 많은 양의 GMO 면화 종자를 재배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UN도 찬성하는 보고서를 냈고, 바티칸도 동의했고, 유럽의 일부 과학자도 안전성을 인정했습니다. 정치가들은 다르지만요.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25개국이 GMO를 인정했고, 더 늘어날 겁니다. 필리핀의 경우, 예전엔 옥수수 소비량의 25%를 수입에 의존했습니다. 하지만 GMO 종자를 재배하면서, 이제부터는 내부 생산으로 모두 해결이 됩니다.”

―GMO 반대론자들이 하는 이야기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식량은 매우 감정적인 이슈라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본적으로 각국의 과학자들이 모여 토론을 통해 독립적인 결정을 내리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참 생각하다) 물론 논란이 완전히 사라지긴 어렵겠지만, 언젠가는 대화가 GMO의 안전성 논란을 상당 부분 풀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업의 마이크로소프트”라는 독점 논란도

GMO의 안전성 얘기만 해도 인터뷰 예정시간의 절반이 훌쩍 넘어갔다. 이제 기업인들이 궁금해하는 질문을 할 차례다. 기업인들에게 몬산토는 ‘변신의 귀재’로 벤치마킹 대상이다.

―잘나가던 종합화학회사가 왜 GMO를 만드는 ‘위험한’ 변신을 해야 했나요?

“당시에는 제가 CEO가 아니었어요(웃음). 하지만 분명한 것은 ‘논리적인 전략’과 ‘철저한 준비’만이 그런 변신을 가능케 해준다는 겁니다. 우리는 1980년대부터 생명공학 사업을 준비해서 1995년 들어 핵심 사업을 농업생명공학으로 전환했어요. 1970년대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석유화학산업의 불안정성을 절실히 느낀 뒤 거시적인 사회 변화를 탐색하다가 결국 식량에서 기업의 비전을 찾은 것이지요.”

―그 과정에서 약 80억달러 규모의 대형 인수·합병(M&A)을 잇달아 시도한 것으로 압니다. 사업 전환과 인수·합병에도 불구하고 조직이 흔들리지 않은 비결은 무엇입니까?

“핵심사업 전환을 앞두고 꾸준한 연구개발(R&D) 투자로 기술을 확보하는 한편, 끊임없는 사내 토론으로 조직원들을 설득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GMO 사업에 대해 조직원들의 동의를 얻었고, 장기적인 추진 동력을 만들 수 있었어요.”

몬산토의 연구 단지는 곳곳에 있는데, 세인트루이스 본사와 인접한 연구 단지만 해도 면적이 210에이커(약 25만평)에 이른다. 그 안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기술이 담겨 있다. 가령 종자를 실험하는 실험실에서는 로봇 팔이 지름이 수mm 정도밖에 안 되는 시험관 수백개에다 몇 초에 한 번씩 실험용 식물을 심고 뽑기를 반복한다. 이 같은 기술은 모두 특허로 보호된다. 사진 촬영도 금지했다.

기자는 몬산토 논란의 두 번째 쟁점으로 화제를 돌렸다. 독점과 시장 지배 논란이다. 몬산토는 독창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다른 기업의 벤치마킹 대상이지만, 소비자인 농민과 시민단체로부터는 ‘농업의 마이크로소프트’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몬산토는 이른바 ‘잠금(lock-in) 전략’으로 유명하다. 곡물 종자를 지적자산화해서 한 번 거래를 맺은 고객은 높은 프리미엄을 지불하더라도 재구매할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몬산토의 종자로 재배한 작물로부터 종자 채취를 금지하는 계약을 맺어 종자의 재구매를 유도한다.

―몬산토의 기술에만 얽매이게 되면, 오히려 농민들이 선택할 자유가 제한받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반드시 우리 제품을 쓰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기존처럼 다른 종자를 쓰거나, 다른 농약을 쓰면 그만입니다.”

―몬산토가 그렇게 혼자 세계의 GMO 종자를 개발하다 보면, 자칫 미국 외 지역에는 맞지 않는 종자를 개발해 오히려 수확률이 줄어들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유전적인 다양성(gene diversity)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물론 유전적인 다양성을 잘 알아야 각 지역에 맞는 종자를 개발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인도와 중국, 아시아 전체의 식량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데, 해당 지역에 맞는 종자를 개발할 필요가 있죠. 이를 해결하려면 아시아 지역 파트너와의 공동 연구가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가 모든 것을 독점적으로 발명하리라는 믿음은 너무도 순진한 것입니다. 진정한 혁신은 ‘관계(relationship)’에서 발생해요.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협력에 문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쌀, 옥수수, 밀의 염기 서열 순서를 공개하기도 했고, 미국에서는 220개의 면화 종자 회사들에 15년간 기술 사용권을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수확률이 두 배가 되면 식량 가격이 폭락할 텐데, 그러면 미국 농민들의 생활이 더 나빠지는 것 아닙니까?

“음…. 글쎄요. 그런 비판도 일부 있죠. 하지만 그건 미국 이야기고, 자급률 자체가 낮은 지역에서 그런 걱정은 사치일 것입니다. 한국의 식량 자급률이 지금 25% 정도 되던가요? (배석자가 쌀만 자급하고 밀, 옥수수, 콩 등 대부분은 수입한다고 하자) 그러면 계속 식량을 수입해야 하겠죠. 그리고 농지 면적도 줄어들고 있지 않나요? 몬산토는 그런 국가에 도움이 될 겁니다. 식량 가격뿐 아니라 다른 문제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저희는 (GMO를 통해) 수확률을 높이면서, 농업에 투입되는 물과 에너지도 3분의 1로 줄이려고 합니다.

지난해를 돌이켜 보면, 먼저 식량 위기가 왔고, 에너지 위기가 뒤를 이었으며, 마지막으로 금융 위기가 왔어요. 이 중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순히 미디어들이 한 위기에서 다른 위기로 초점을 옮긴 것뿐이죠. 모든 문제 자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그리고 세 가지 문제들이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우리는 뭔가 해결해내야 합니다.”

―실제 GMO 종자를 사용하는 농민들을 만나 보십니까?

“그럼요. 인도에서 150명을 한꺼번에 텐트에서 만나보기도 했죠.”

―인도 농부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그곳에서 만난 인도 농민의 경작지가 평균 0.5헥타르(1500평) 정도 됩니다. 미국에 비하면 매우 영세한 농민들이죠. 그때 그들의 첫 질문이 뭐였는지 아세요? 도대체 언제쯤 가뭄에 강한 제품이 나오느냐는 거였습니다. 바로 저희가 개발하고 있던 제품이죠. 미국 미시시피 삼각주에서 사용된 기술이, 자신들에게도 이득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기술의 민주주의’입니다.

농업의 생산성을 높이려면 일반적으로 큰 기계가 필요하고, 투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규모의 경제가 중요해지지요. 하지만 생명공학은 규모의 경제와 상관이 없습니다. 수천 에이커건, 1에이커건 똑같은 효과를 봅니다. 영세한 농민도 똑같은 혜택을 볼 수 있는 거죠.”

홍보 담당자가 “다음 스케줄로 이동해야 한다”고 끼어들었다. 예정했던 인터뷰 1시간이 10여분을 넘기고 있었다. 그가 “시간이 정말 빨리 가네요!”라고 외쳤다. 짧게 질문하겠다고 하자 “제 경험상 보통 짧은 질문에는 대답이 길죠”라며 크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좀 가벼운 질문을 하죠. 스코틀랜드 출신인데, 미국에서 일하면서 문화적인 차이를 느끼신 적은 없습니까? 그러고 보니 이름이 같은 배우도 스코틀랜드 출신이군요.

“그래요. 사실 저는 그를 잘 모릅니다(큰 웃음). 신기한 우연의 일치죠. 미국에서 문화적인 차이를 느낀 적은 없습니다. 제가 무슨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지, 팀으로 같이 일할 수 있는지가 중요할 뿐, 내가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유럽에서 자랐지만,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일했어요. 이런 경험이 다국적 회사에서 일하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됩니다.”

그랜트 회장의 말대로 몬산토는 과연 먹을거리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몬산토가 쌓은 농업생명공학 연구는 지금으로선 세계 누구도 따라잡기 힘든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이론이 아닌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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