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경제위기] 금융 변종플루 진단:인터뷰/자크 사피르

“지금의 위기는 변종 바이러스” 
[Cover StoryⅠ]금융 변종플루 진단:인터뷰/프랑스 경제석학 자크 사피르
 
 [이코노미인사이트 1호] 2010년 05월 03일 (월)  http://www.economyinsigh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


한광덕 총괄 편집장  eoconomyinsight@hani.co.kr 
 
 
프랑스의 경제 석학 자크 사피르 파리 고등사회과학원 경제학 교수는 <이코노미 인사이트>와 4월 초 가진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번 경제 위기의 병원체를 ‘모기지 위기→은행 위기→유동성 위기→국가부채 위기’로 이어가는 ‘변종 바이러스’라고 진단했다. 그는 특히 아시아 국가들이 내수 시장 확대와 지역적 통화결제 시스템 구축에 실패한다면 또다시 위기를 맞을 것이 분명하다고 경고했다. 위기를 앞두고 정부를 무장해제시킨 주류 경제학자들을 ‘지적인 마피아’라고 규정한 사피르는 “이들이 여전히 글을 쓰고 말을 하고 있다는 게 참으로 기이한 미스터리”라고 통렬히 비판했다.


      
자본주의와 시장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경제와 시장경제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그 둘은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이론적인 의미에서 볼 때 시장은 조정1)의 한 양식이지만 유일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다소 느슨한 의미에서 시장경제란 용어를 ‘계획경제’나 ‘혼합경제’에 대비하기 위해 사용한다. 비자본주의 경제체제 안에도 시장이 존재한다는 점을 망각한 채로 말이다. 시장경제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그들 자신이 어떤 시장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어떤 시장은 그 자체가 제도이며 전세계의 주식시장처럼 시장이 때로는 곧 기업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모르는 체한다. 시장원리의 전일적 지배를 받는 엄밀한 의미의 시장경제는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 계급과 국가가 없는 사회처럼 하나의 유토피아다.


그러면 자본주의는 시장의 복잡계로 이해하면 되나?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시장 개념보다 더 풍부한 동시에 훨씬 더 엄격한 의미를 지녔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는 ‘이중의 분리’가 존재한다는 데 근거를 둔다. 첫 번째는 생산자간의 분리다. 이 분리는 처음엔 상호조정되지 않고, 사후적으로 조정이 이뤄지는 (시장을 통한) 사회적 분업을 말한다. 두 번째는 임금노동자와 자본의 분리, 즉 노동계급의 존재를 의미한다. 생산자간 분리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상존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투자는 그 결과에 대한 확실한 보장 없이 이뤄진다. 현대 사회 금융부문에서 전형적으로 표출되는 불확실성의 근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케인스주의자 하이먼 민스키(Hyman P.Minsky)가 기업가를 ‘금융 경영인’으로 간주한 이유 중 하나다. 만약 위기가 대부분의 경우 단순한 ‘가능성’으로만 남는다면, 그 이유는 바로 이 분리에서 비롯된 불확실성을 제한하는 제도와 관행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도의 역할은 주류 경제학자들에 의해 무시돼왔다. 제도가 경제 안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주류 경제학이 인정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자본주의는 많은 학자들이 위기 앞에서 보여줬던 근시안적인 사고를  더이상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제 논의를 현실자본주의로 옮겨보자. 이번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서브프라임이나 은행의 탐욕을 지목하는 견해에 대해  소득의 불평등한 분배가 근본원인이라고  반박했는데 그 논거를 설명해달라.


우선 이번 위기가 국민의 대다수가 빈곤해진 미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2000년 이후 미국인 3분의 2는 소득이 늘지 않거나 오히려 줄었으며 그들은 대출을 받지 않고서는 예전의 소비수준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가계부채  또한 1990년대 초에 GDP의 60%였던 것이 2007년에는 100%로 증가했다. 이것이 서브프라임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다음으로는 무역과 통화의 불균형이 위기를 불렀다. 금융부문은 위기 발생의 과정에서 하나의 고리를 제공했기 때문에 은행과 감독당국이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번 위기를 단순하게  ‘금융위기’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번 위기의 근본원인은 국가적, 세계적 차원의 규제완화와 같은 제도적 무질서와, 임금 하락과 소득분배의 왜곡과 같은 실물경제의 문제에 있기 때문이다.


2008년 당시에 경제위기가 지난해 말까지 계속될 것으로 예측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 이제 종착역에 다달은 것인가, 아니면 계속 곪아가고 있는 것인가?


지금의 위기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다만 경제위기의 형태는 변화하고 있다. 나는 2008년 카라카스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이 위기를 ‘변종 바이러스’에 빗댄 바 있다. 이 위기는 모기지 신용대출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후에는 은행위기로 진화했으며, 이어서 전반적인 유동성 위기로 변모했다. 지금은 여러나라의 국가부채 위기로 변해가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특이한 점은 위기가 새로운 형태를 띠면서 경제 당국을 놀라게 하고 있지만 과거에 지녔던 위험성은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은행들은 다시 수익을 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극도로 불안정하다. 실제로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은행들은 이제부터 사적 부채 대신 공적 부채에 의존해 예전처럼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용인될 수 없다. 먼저 도덕적인 이유 때문이지만 이는 부차적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은행가들은 도덕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부채가 대가를 치르지 않고 증가하는 시스템은 오래갈 수 없다는 점을 이유로 들 수 있다.


미칠 정도로 깊은 수렁


상업은행과 투자은행 사이에 ‘칸막이’를 친 1933년의 ‘글라스 스티걸법(Glass-Steagall Act)’이나 최근의 ‘볼커 룰(Volcker Rule)’로는 부족하다는 것인가?


은행 시스템에  ‘실물’ 경제에 대한 의무를 부여해야 한다. 이것은 경제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아쉽게도 충분조건은 아니다. 위기의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면 바이러스는 또다시 변모할 것이다. 새 국면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위기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할 가능성은 안타깝게도 거의 없다.
이미 그리스는 국가부채위기라는 새로운 국면을 겪고 있다. 그리스의 뒤로는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포르투갈이 부각되고 있으며, 그 너머엔 빚이 가장 많은 나라, 미국이 몰골을 드러낼 것이다. 국가채무 위기가 달러에 미칠 때면 우리는 정말 미칠 정도로 깊은 수렁에 빠져들 것이다.


변종 바이러스를 잉태한 자양분은 어디에서 비롯됐나? 잘못된 성장의 경로라고 지적한 1980년대 보수혁명과 레이거노믹스도 바이러스의 음습한 토양이 됐을 것으로 본다. 
보수혁명은 경제정책 측면에서 전반적인 규제 완화와 통화 긴축의 형태를 띠었으며, 기업과 부자들의 세금을 감면시켜 GDP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몫을 크게 증가시켰다. 시장에 대한 열광과 맹신은 자유무역을 확장시키고, 정부지출을 축소해 공공서비스의 붕괴를 가져왔다. 이러한 반혁명을 경제학에서는 가장 낡고 반동적인 생각들이, 수학적 표현이 주는 엄밀성이란 옷을 입고 화려하게 변신해 권력으로 귀환한 것으로 해석한다.

합리적 기대(1970년대)와 동학적 일반균형이론 (Modeles dit l‘Eauilibre General Dynamique)2)이 도입된 이후 주류 경제학자들에게 경제란 ‘인간은 오류를 범하지 않으며, 은행시스템은 존재하지 않고, 화폐는 오직 교환적 동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 일 뿐이다. 1970~1980년대의 반혁명에서 직접적으로 도출된 이 모델들은 지금의 위기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이 반혁명의 결과는 모든 영역에서 재앙과 같았다. 소득분배 구조의 왜곡은 최상위층을 더 부자로 만들었다.

미국 내 최상위 1%의 수입은 1970년대 말에는 총국민소득의 8%였으나 2005년에는 20%에 이르렀다. 하지만 상위 1% 또는 5%의 소비가 성장을 이끄는 것이 아니다. 공정한 분배는 그 나라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필요하지만 단지 도덕적인 이유만은 아니다. 공정한 분배는 강력한 성장에 필수적인 조건이다. 이번 위기의 근본적인 책임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 서구 나라들에게 강제적으로 부여된 이러한 메커니즘에 있다. 또 다른 책임은 모든 것이 ‘최선의 세계에서 최선의 선택’이라고 설명했던 주류경제학자들의 담론에 돌려질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저축할 수는 없다

임금 소득이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출 등으로 소비가 증가한 게 문제라고 했는데, 반면 저축이 늘게 되면 가뜩이나 힘든 경제를 더욱 위축시켜 경기의 진폭을 커지게 할 수 있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나?


이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다. 투자를 위해서는 저축이 필요하다. 그런데 투자의 수익은 상당한 소비가 있을 때만 창출된다. 위기 때 소비를 유지하는 게 바람직한 이유다. 위기는 무엇보다 소비와 저축, 소비와 투자 사이에 불균형이 발생했다는 신호다. 이 불균형을 교정해야 하며, 이것은 수익의 분배를 교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비는 신용에 의해 인위적으로 유지되어 왔지만 이와 같은 시스템은 오래갈 수 없었다. 신용에 의해 유지되는 시스템이 이번 위기의 기술적 원인이 된 금융상품의 급속한 발전을 낳았다. 위기의 원인이 된 금융 시스템을 다시 작동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소득분배의 원칙을 고치는 것이 시급하다. 과도한 저축은 과잉투자의 문제를 부른다. 과잉투자는 우선  투자자본의 수익성 하락을 낳을 것이며, 나아가 자본재 부족으로 이미 결정된 투자를 실행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도 가중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소련에서 나타났다. 
이 문제는 아시아권에서는 다르게 표출된다. 아시아 국가의 투자는 내수뿐만 아니라 수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중국과 한국이 높은 저축률을 유지하려면 서구 나라들이 저축을 멈춰야만 한다. 만약 서구 나라들이 저축을 멈춘다면, 자신들의 산업기반이 위축되고 생산수단은 성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수익을 낼 수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서구 국가들은 인구의 고령화로 인해 상대적으로 높은 저축률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아시아와 유럽이 동시에 대규모의 저축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향후 20년간 아시아 국가들은 성장의 원천을 내수시장에서 찾아야 한다. 내수시장은 가계의 직접적인 지출만이 아니라 사회·교육 시설로 대표되는 공공소비와 사회·의료적 보장을 의미한다. 소비에트연방의 역사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지나친 저축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높은 투자율은 장기간 유지될 수 없고, 과잉축적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아시아 국가들은 중장기로 소비 억제를 멈춰야 한다. 


경기 역행적(반경기적·contra-cyclical) 정책인 정부지출과, 국가재정 악화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하나?

공공지출은 정부의 고전적인 경기 역행적 대응이다. 재정적자를 늘리는 것은 소비에 활력을 주는 수단이다. 그러나 공공지출 역시 구조적인 측면에 유의해야 한다. 인프라에 대한 지출이나 교육, 과학, 연구, 보건 그리고 사회보장 영역에 대한 지출의 경우가 그렇다. 이 같은 지출의 직접적인 경제 효과는 1년 단위로 측정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서 대체로 과소평가된다. 그러나 이들의 경제적 효과를 부인할 수는 없다.
가장 놀라운 경우는 기초과학 연구개발에 대한 지출이다. 기업들은 여기에 거의 흥미가 없을 뿐더러 진행할 시간도 없다. 18~19세기에는 부유한 아마추어들이 자주 이런 연구를 하곤 했다. 오늘날은 오직 국가만이 이 같은 연구들에 소요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런데 기초적 연구 없이는 응용연구가 진행될 수 없다. 기업들의 혁신은 대부분의 경우 특허를 받지 못하는 응용연구에 의존한다. 응용연구도 기업이 감당하기에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것은 국가가 담당해야 한다. 미국항공자문위원회(NACA)와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공공지출 확대는 국채발행 남발과 금리 상승으로 인한 구축효과로 이어질텐데….

물론 경기 역행적 지출은 재정적자와 국채 증가라는 문제를 낳는다. 그러나 국채 이자는, 1945~1950년의 전후 시기처럼 충분히 극복될 수 있다. 국가가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지 않으면 큰일나는 운명의 그 날을 제외한다면 국채는 중대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앙은행이 국채 매입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은 중앙은행의 독립이라는 교리가 나오기 전까지는 하나의 규범이었다. 
이는 은행들이 1%에도 못 미치는 이자율로 자금을 조달하는 반면, 국가는 최소한 3.3%의 이자율(독일의 평균 이자율)로 차입을 하라고 하는 역설적 상황을 낳았다.  물론 GDP의 20%에 달하는 적자를 모두 중앙은행을 통해 조달한다면 인플레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문제를 삼는 현실이 아니다. 만약 주요 선진국이 경제위기나 구조적 지출로 생겨난 GDP의 5~6%에 해당하는 적자만을 중앙은행을 통해 조달한다면 인플레는 겪지 않을 것이다. GDP의 성장률을 훨씬 상회하는 이자율을 국가가 부담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국채는 문제되지 않는다.


경제위기 이후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케인스주의자와 폴 크루그먼(Paul Krugman), 누리엘 루비니(Nouriel Roubini) 교수 등의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주류 경제학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필립 아레스티스(P.Arestis)나 폴 데이비슨(P.Davidson), 존 갈브레이스(J.Galbraith)와 같은 포스트 케인시언과, 경제위기에 관한 통찰력은 있었지만 주류 경제학파에 속해 이 위기에 책임이 있는 학자들은 구분해야 한다. 민스키의 지적 후계자들로서 레비경제연구소를 주축으로 모인 미국의 포스트 케인스주의자들과 영국의 포스트 케인스주의자들(Arestis, Kregel, Hodgson), 프랑스의 몇몇  조절학파 학자들,  그리고 전통 제도학파의 일부 학자들은 전체적으로 주류경제학자들보다 옳았다. 우리가 주류라고 일컫는 학파의 우월적 지위는 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헤아릴 수 없는 오류를 범했다. 그들의 주장은 다가오는 경제위기 앞에서 정부를 무장해제시켰다. 학문적 관점뿐만 아니라 실제 경제 문제에서도 완전히 신뢰를 잃은 이들이 여전히 글을 쓰고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미스터리다. 이 미스터리의 기원은 건강하고 열린 토론의 규칙보다는 ‘지적인 마피아’를 닮은 그들의 활동방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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