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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건강과 대안 &#187; 피카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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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반전/평화] 피카소의「한국에서의 학살」과 미군의 세균전 (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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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9 Mar 2010 10:03:55 +0000</pubDate>
		<dc:creator>건강과대안</dc:creator>
				<category><![CDATA[반전·평화·민주주의]]></category>
		<category><![CDATA[731부대]]></category>
		<category><![CDATA[노근리 사건]]></category>
		<category><![CDATA[미군 세균전]]></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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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한국에서의 학살]]></category>
		<category><![CDATA[한국전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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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6.25, 한국은 미-일의 ‘마루타’였다 피카소의「한국에서의 학살」과 미군의 세균전 (2) 출처 : 코리아포커스 , 2006-04-21 오전 9:56:11&#160;&#160; &#160; 사진 : 첨파파일 1 ▲ 미국의 세균전 의혹&#160;(왼쪽) 미국의 세균전을 파헤친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5 width=650 border=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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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PADDING-RIGHT: 0px; PADDING-LEFT: 0px; PADDING-BOTTOM: 5px; PADDING-TOP: 25px"><SPAN class=newstitle>6.25, 한국은 미-일의 ‘마루타’였다</SPAN></TD></TR><br />
<TR><br />
<TD class=subtitlegold style="PADDING-RIGHT: 0px; PADDING-LEFT: 2px; PADDING-BOTTOM: 0px; PADDING-TOP: 0px">피카소의「한국에서의 학살」과 미군의 세균전 (2)</TD></TR><!--기사 원문 및 올린시간 --><br />
<TR><br />
<TD class=newsM style="PADDING-RIGHT: 0px; PADDING-LEFT: 0px; PADDING-BOTTOM: 0px; PADDING-TOP: 5px" align=right><FONT color=#999999><SPAN class=newsbonmun><FONT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20%" color=#818464>출처 : 코리아포커스 , 2006-04-21 오전 9:56:11&nbsp;&nbsp;</SPAN></FONT> </FONT></TD></TR></TBODY></TABLE><br />
<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 border=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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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IMG height=10 src="http://www.coreafocus.com/design/blank01.gif" width=1></TD></TR></TBODY></TABLE><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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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 본문 시작 -------------------------------------><br />
<TD style="TEXT-ALIGN: justify"><SPAN class=newsbonmun><FONT style="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150%; FONT-STYLE: normal; FONT-FAMILY: 굴림,굴림체; FONT-VARIANT: normal"><!-- 메인 이미지 배치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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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height=2>사진 : 첨파파일 1</TD></T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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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class=menu><FONT style="FONT-WEIGHT: normal; FONT-SIZE: 9pt; COLOR: #3a6e7c; LINE-HEIGHT: 120%; FONT-FAMILY: verdana,굴림; TEXT-DECORATION: none">▲ 미국의 세균전 의혹&nbsp;<BR>(왼쪽) 미국의 세균전을 파헤친 『The United States and Biological Warfare』(가운데) 『The United States and Biological Warfare』의 한국어 번역판 『한국전쟁과 세균전』(오른쪽) 한국전쟁 당시 전선지역에서 미군의 세균무기 사용을 조사했다는 북한 의학과학원 김성중 교수(의사)가 2004년 8월 26일 조선중앙TV에 출연하여 미국 전투기들이 지나간 곳에 전염병균이 득실거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FONT style="FONT-SIZE: 8pt; COLOR: #959595; LINE-HEIGHT: 120%">ⓒ 인디아나대학출판사/중심/연합뉴스</FONT> </FONT></TD></T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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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height=10></TD></TD></TR></TBODY></TABLE><B>전단용 폭탄이 세균폭탄으로 개조되어 사용</B><BR><BR>오랫동안 묻혀 있던 한국전쟁 시기 미국의 세균전에 관한 논란은 동서냉전이 끝난 1998년 무렵 미국 사회에서 되살아났다.<BR><BR>소련의 붕괴 이후 공개된 문서 중에서 ‘세균전 조작설’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발견되자 미국의 보수파 학자들은 중국과 북한이 세균전을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손으로 베낀 소련 문서에는 “국제과학조사단이 조사에 나서기 전에 북한이 시체에 세균을 주입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BR><BR>이 소식을 들은 북한은 “미군이 1952년 북한 지역 400여 군데에 700회 이상 세균탄을 투하해 콜레라, 페스트, 장티프스 등 각종 전염병을 퍼뜨렸다”며 대대적인 반미공세를 폈다.<BR><BR>한편 일단의 학자들에 의해 손으로 베낀 소련문서는 스탈린 사후 소련의 권력 투쟁 와중에 내무장관이었던 베리아가 자신의 정적이었던 외무장관 이그나티에프를 제거해내기 위해 조작한 문서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왜냐하면 소련 문서의 출처와 베껴 쓴 사람이 밝혀지지 않은데다 그 문서의 진본도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BR><BR>게다가 1998년 스티븐 앤디컷과 에드워크 해거먼이 20년 동안 미국ㆍ중국ㆍ북한ㆍ캐나다ㆍ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 모은 광범위한 비밀문서와 관련 인물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The United States and Biological Warfare』라는 책을 펴내자 상황이 달라졌다. <BR><BR>이들은 한국전쟁 당시 중국과 북한이 세균 폭탄이라고 공개한 사진의 실체를 공개된 미국의 비밀문서를 통해 밝혀냈다. 미국은 오랫동안 중국과 북한이 공개한 사진을 전단용 폭탄일 뿐이라며, 공산주의자들의 터무니 없는 선전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런데 미국 스스로 “전단용 폭탄이 세균폭탄으로 개조되어 사용됐다”고 기록한 문서를 찾아낸 것이다. <!-- 본문 기사 끝 -------------------------------------></FONT></SPAN></TD></TR></TBODY></TABLE><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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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TEXT-ALIGN: justify"><SPAN class=newsbonmun><FONT style="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150%; FONT-STYLE: normal; FONT-FAMILY: 굴림,굴림체; FONT-VARIANT: normal"><!-- 메인 이미지 배치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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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height=2>사진 : 첨부파일 2</TD></T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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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class=menu><FONT style="FONT-WEIGHT: normal; FONT-SIZE: 9pt; COLOR: #3a6e7c; LINE-HEIGHT: 120%; FONT-FAMILY: verdana,굴림; TEXT-DECORATION: none">▲ 노근리 사건에서도 확인된 미국의 ‘부인하고 본다는 철칙(Doctrine of Plausible Denial)’&nbsp;<BR>(왼쪽) 오연호의『노근리 그 후』(1999)의 표지에 등장한 피카소의 학살도 (오른쪽) 노근리 지역에 미군이 주둔했음을 증명하는 미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제2대대 작전과장 위더스푼 소령이 작성한 부대배치도. 미군 제7연대 2대대(맨 왼쪽 깃발)가 바로 노근리에 배치되어 있다. <FONT style="FONT-SIZE: 8pt; COLOR: #959595; LINE-HEIGHT: 120%">ⓒ 월간 말 / AP 최상훈(잉걸출판사)</FONT> </FONT></TD></T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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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height=10></TD></TD></TR></TBODY></TABLE><B>가해자의 기록보다 가치가 없는 피해자의 생생한 목소리</B><BR><BR>한편 피카소의 그림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충북 영동군 노근리 민간인 학살사건 취재기를 적은『노근리 그 후』(1999)의 표지에도 등장했다. 오연호는『말』지 1994년 7월호에서 노근리 사건을 심층보도했으며, 이 사건은 훗날 AP가 세계적인 특종(?) 보도를 함으로써 유명해졌다.<BR><BR>4ㆍ19혁명 직후인 1960년 12월 27일, 충청남도 경찰국 공보주임과 반공연맹 충남도지부 총무과장을 역임한 정은용 노근리사건 대책위원장은 노근리사건은 전쟁법규위반사건이라며 서울 소재 주한미군 소청사무소 앞으로 손해배상 신청서를 제출했다.<BR><BR>그러나 미국은 오만과 독선으로 진실을 호도했고, 한국의 언론과 군사독재정권은 기독교인이며 반공주의자인 정은용의 목소리를 외면했다.<BR><BR>이에 굴하지 않고 정은용은 1994년 일흔 셋의 나이에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노근리사건 실록소설을 출판하는 집념을 보였다.<BR><BR>그 결과 역사학자들과 기자들은 미국립문서보관소(NARA)의 문서더미 속에서 노근리 학살사건을 증명하는 미군의 작전기록과 비밀해제 문서를 찾아냈다. AP의 세계적 특종 해프닝은 피해자의 생생한 증언이 가해자의 기록보다도 가치가 없음을 드러낸 현대 역사학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었다.<BR><BR>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부인하고 본다는 철칙(Doctrine of Plausible Denial)’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미국은 1997년 노근리 생존자와 유족들이 피해배상을 신청하자, 한국 검찰에 &#8220;미 제1기병사단이 당시 노근리 지역에 주둔했다는 증거가 없다” 는 뻔뻔스러운 답변서를 보내기도 했다.<BR><BR>그러나 미국립문서보관소에는 당시(1950년 7월 26일) 노근리 지역에 미군이 주둔했음을 증명하는 미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제2대대 작전과장 위더스푼 소령이 작성한 부대배치도가 남아 있었다. <!-- 본문 기사 끝 -------------------------------------></FONT></SPAN></TD></TR></TBODY></TABLE><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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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TEXT-ALIGN: justify"><SPAN class=newsbonmun><FONT style="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150%; FONT-STYLE: normal; FONT-FAMILY: 굴림,굴림체; FONT-VARIANT: normal"><!-- 메인 이미지 배치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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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height=2>사진 : 첨부파일 3.</TD></T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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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class=menu><FONT style="FONT-WEIGHT: normal; FONT-SIZE: 9pt; COLOR: #3a6e7c; LINE-HEIGHT: 120%; FONT-FAMILY: verdana,굴림; TEXT-DECORATION: none">▲ 일본군 731부대장과 산성동 폭격 미군 ‘정찰임무보고’&nbsp;<BR>(왼쪽) 생체실험을 주도한 악마부대 일본군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중장 (오른쪽) 산성동을 폭격하여 민간인 학살한 미군의 ‘정찰임무보고(MMR)’. 폭격시각, 호출부호, 기수 기종, 탑재 무기, 폭격 결과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FONT style="FONT-SIZE: 8pt; COLOR: #959595; LINE-HEIGHT: 120%">ⓒ 중국 하얼빈 731부대 전시관 / 도진순(미국립문서보관소)</FONT> </FONT></TD></T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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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height=10></TD></TD></TR></TBODY></TABLE><B>일본군 731부대의 한국전 참전과 미군의 산성동 폭격사건</B><BR><BR>한국전쟁의 진실을 밝혀내려는 국내외 양심적인 학자들의 연구성과에 힘입어 2000년 6월 도진순 교수는《한국전쟁 50주년 학술심포지엄》에서 &#8220;일본이 한국전 당시 미군을 도와 한반도에서 상륙작전과 세균전에 참여&#8221;했음을 밝혔으며, 2000년 7월 2일에는 MBC《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일급비밀! 미군의 세균전」을 방영하기도 했다.<BR><BR>미국은 1947년 일본군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중장을 비롯한 부대 관계자들을 모두 전범 기소에서 면제했다. 일본군 731부대는 한국인과 중국인을 ‘마루따’로 생체실험을 한 악마의 부대였다. <BR><BR>이들 731부대 전범들은 한국전쟁 당시 도쿄에 본부를 둔 미군 극동의무사령부 산하 406의무부대 및 8003부대에서 복무했다. 이 부대가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에 쓰인 병원체를 배양했던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BR><BR>일본군은 극비로 세균전 뿐만 아니라 미군의 원산상륙작전과 인천상륙작전에도 참가했으며, 일본의 전범들은 한국전 참전을 계기로 면죄부를 얻고 화려하게 부활했다.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이들은 현재까지도 일본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일본 우익세력의 뿌리가 되었다.<BR><BR>이후 도진순 교수는 안동 MBC 강동규 PD와 함께 미10군단이 1951년 1월 경북 예천군 보문면 산성동의 민간인들을 네이팜탄 등으로 폭격하여 참혹하게 살해한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BR><BR>도 교수는 비밀해제된 당시 미군의 군사작전 명령서를 분석하여 미 공군의 폭격에 의한 산성동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음을 밝혀『역사비평』(2005년 가을)에 발표했다. 이 논문을 통해서 50년이 넘도록 입소문으로만 떠돌던 사건들이 사실(史實)이 되었다.<BR><BR>미군의 3차례에 걸친 폭격으로 134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들은 모두 민간인으로 여자가 80명이었으며, 1차 폭격 당시 정찰기 조종사였던 시몬스는 “적정이 없고 여자와 아이들만 있다”는 이유로 폭격을 거부하기도 했다. <BR><BR>그러나 미국은 오폭과 민간인 학살을 인정하지 않고 “산성동 폭격은 정당하다”며 50년 이상 관련 사실을 은폐하였다. <!-- 본문 기사 끝 -------------------------------------></FONT></SPAN></TD></TR></TBODY></TABLE><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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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TEXT-ALIGN: justify"><SPAN class=newsbonmun><FONT style="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150%; FONT-STYLE: normal; FONT-FAMILY: 굴림,굴림체; FONT-VARIANT: normal"><!-- 메인 이미지 배치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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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nbsp;<BR>사진 : 첨부파일 4</TD></T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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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class=menu><FONT style="FONT-WEIGHT: normal; FONT-SIZE: 9pt; COLOR: #3a6e7c; LINE-HEIGHT: 120%; FONT-FAMILY: verdana,굴림; TEXT-DECORATION: none">▲ 유신독재정권의 검열에 의해 삭제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nbsp;<BR>정영목 교수가 『조형』24호(2001)에 공개한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의 검열로 삭제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도판. 1977년 대학시절 일본에서 보낸『현대세계미술전집』14권 ‘피카소’편에 수록된 「한국에서의 학살」흑백도판(왼쪽)이 원판(오른쪽)과 비교해 볼 때 검게 칠해져 삭제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FONT style="FONT-SIZE: 8pt; COLOR: #959595; LINE-HEIGHT: 120%">ⓒ 정영목</FONT> </FONT></TD></T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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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height=10></TD></TD></TR></TBODY></TABLE><B>1등 신문(?)《조선일보》의 생뚱맞은 참견</B><BR><BR>피카소의「한국에서의 학살」에 대한 역사학자와 사회학자의 뜨거운 관심과 비교해볼 때, 정작 미술사학계의 연구는 미비한 형편이다.<BR><BR>미술사학계에서는 서울대 정영목 교수가 거의 유일하게 관련 연구를 했다. 정 교수는 1996년『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8권에 「피카소와 한국전쟁 &#8211; ‘한국에서의 학살’ 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고했으며, 2001년에는『조형』24호에 「미술과 정치 : 피카소의 한국전쟁 관련 작품과 한국, 일본의 추상미술, 1950~1960」을 발표했다.<BR><BR>정 교수는 1977년 대학시절 일본에서 보낸『현대세계미술전집』14권 ‘피카소’편에 수록된 「한국에서의 학살」흑백도판이 검열기관에 의해 지워진 채로 우송된 사실과 비밀해제된 미국 FBI 문서를 통하여 피카소가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한 이후 무려 25년 간 소련의 첩자로 분류되어 FBI에 의해서 철저하게 사생활을 감시당했다는 사실을 밝혔다.<BR><BR>그러나 그의 논문에 기존의 학계에서 밝혀낸 미군의 세균전이나 민간인학살의 연구 성과를 거의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를 나타냈다.<BR><BR>한편 왜곡・과장・편파보도로 악명이 높은 1등 신문(?)《조선일보》가 생뚱맞게도 정광균의「피카소 &#8216;한국에서의 학살&#8217;」을 2002년 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작으로 선정하면서 뒤늦게 이 문제에 개입했다.<BR><BR>외교통상부 퇴직관료 출신인 정씨의 평론은 예전에 발표된 신은철 교수와 정영목 교수의 연구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으며, 문장력 자체도 신춘문예의 미술평론 당선작으로는 함량 미달이 분명해 보인다. <BR><BR>정씨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그는 “일방적이고 균형을 잃은 편견”으로 한국전쟁과 피카소의「한국에서의 학살」을 평가했다. 그는 1950년대 당시 반공진영과 좌파진영이 모두 피카소의 학살도를 미군의 세균전과 민간인 학살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한 사실을 외면했다. 정씨는 50년 가까운 세월동안 한국의 독재정권과 정보기관이 무슨 이유로 검열을 통해 이 그림의 흑백 도판조차 국내반입을 금지했는지에 대해 침묵했다. <!-- 본문 기사 끝 -------------------------------------></FONT></SPAN></TD></TR></TBODY></TABLE><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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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TEXT-ALIGN: justify"><SPAN class=newsbonmun><FONT style="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150%; FONT-STYLE: normal; FONT-FAMILY: 굴림,굴림체; FONT-VARIANT: normal"><!-- 메인 이미지 배치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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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nbsp;사진 : 첨부파일 5</TD></T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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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class=menu><FONT style="FONT-WEIGHT: normal; FONT-SIZE: 9pt; COLOR: #3a6e7c; LINE-HEIGHT: 120%; FONT-FAMILY: verdana,굴림; TEXT-DECORATION: none">▲ 인권과 인간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작업&nbsp;<BR>(왼쪽)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펴낸『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실태보고서』 (오른쪽)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 회원들이 지난해 9월 7일 오후 서울 종각에서 과거청산 전진대회를 열었다. 한국전쟁 당시 시동생 배재환(당시 20세)씨를 잃은 백정순(72) 할머니가 집회 도중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FONT style="FONT-SIZE: 8pt; COLOR: #959595; LINE-HEIGHT: 120%">ⓒ 한울 / 허태주(코리아포커스)</FONT> </FONT></TD></TR><br />
<TR><br />
<TD height=10></TD></TD></TR></TBODY></TABLE><B>누가 뼈에 사무치도록 피가 맺힌 억울한 이들의 한(恨)을 풀어줄 것인가?</B><BR><BR>현재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한국에서의 학살」은 아직까지 한 번도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2004년에 국립현대박물관에서「한국에서의 학살」전시를 추진한다는 발표를 했으나 결국 작품 확보를 하지 못해 무산되고 말았다.<BR><BR>당시 한국 언론은 이 작품의 상징적 의미를 둘러싼 이데올로기의 대립만을 중점적으로 부각했다. 이 작품의 창작 배경이 ‘황해도 신천 양민학살사건’과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관심과 신천 양민학살사건을 벌인 주체가 미군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만을 관심에 두었다.<BR><BR>신천학살사건은 해리슨을 중대장으로 하는 미군 1개 중대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이라는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신천지역의 반공청년단에 의해 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방북 경험이 있는 황석영이나 김원일 같은 소설가들도 신천박물관에서 북한의 주장을 확증할 만한 증거를 전혀 찾지 못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BR><BR>그러나 피카소의「한국에서의 학살」의 창작배경에는 신천학살사건이라는 하나의 사건뿐만이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세균전과 민간인학살 의혹이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60년이 넘도록 이 작품을 둘러싼 여러가지 논란이 있었던 것이다.<BR><BR>지난 2005년 11월, 국가인권위원회는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사건이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모두 669건이며, 대략 25만∼30만명이 학살된 것으로 파악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아직 보고되지 않은 사건을 고려하면 무려 100만명 가량의 민간인이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BR><BR>확인된 669건 중에서 남한에 의한 학살은 170건이었고, 인민군에 의한 학살은 90건이었다. 그리고 미군에 의한 학살 150건에 달했다. <BR><BR>이러한 과거의 어두운 역사에 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지난해 12월 1일 독립기관으로 출범했다. 현재(2006.3)까지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한 2019건의 사건 중에서 1564건(77.5%)이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 집단학살과 관련이 있다. 신청건수의 통계를 통하여 한국전쟁 관련 피학살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의 피맺힌 억울함이 얼마나 뼈에 사무쳤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BR><BR>그러므로 60년 전 피카소가 억울하게 희생당한 민간인들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학살도를 그렸듯이, 이제는 우리가 인권과 인간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진실규명 작업에 나서야만 하지 않을까.&nbsp;<br />
<DIV class=autosourcing-stub><br />
<P style="PADDING-RIGHT: 0px; PADDING-LEFT: 0px; FONT-WEIGHT: normal; FONT-SIZE: 12px; PADDING-BOTTOM: 0px; MARGIN: 11px 0px 7px; PADDING-TOP: 0px; FONT-STYLE: normal; FONT-FAMILY: Dotum"><A href="http://blog.naver.com/inex1/110003635649" target=_blank></A>&nbsp;</P></DIV></FONT></SPAN></TD></TR></TBODY></TABL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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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반전/평화] 「한국에서의 학살」과 미군의 세균전 (1)</title>
		<link>http://www.chsc.or.kr/?post_type=reference&#038;p=1883</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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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9 Mar 2010 09:57:37 +0000</pubDate>
		<dc:creator>건강과대안</dc:creator>
				<category><![CDATA[반전·평화·민주주의]]></category>
		<category><![CDATA[FBI]]></category>
		<category><![CDATA[국제과학위원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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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피카소’ 크레용이 ‘피닉스’로 바뀐 까닭 「한국에서의 학살」과 미군의 세균전 (1) 출처 : 코리아포커스 , 2006-04-17 오전 9:05:35&#160;&#160; &#160; ▲ 피카소(Picasso)의「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ee)」&#160;(왼쪽) 1953년 1월, 일본의 창수사(蒼樹社)에서 펴낸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5 width=650 border=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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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PADDING-RIGHT: 0px; PADDING-LEFT: 0px; PADDING-BOTTOM: 5px; PADDING-TOP: 25px"><SPAN class=newstitle>피카소’ 크레용이 ‘피닉스’로 바뀐 까닭</SPAN></TD></T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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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class=subtitlegold style="PADDING-RIGHT: 0px; PADDING-LEFT: 2px; PADDING-BOTTOM: 0px; PADDING-TOP: 0px">「한국에서의 학살」과 미군의 세균전 (1)</TD></TR><!--기사 원문 및 올린시간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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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class=newsM style="PADDING-RIGHT: 0px; PADDING-LEFT: 0px; PADDING-BOTTOM: 0px; PADDING-TOP: 5px" align=right><FONT color=#999999><SPAN class=newsbonmun><FONT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20%" color=#818464>출처 : 코리아포커스 , 2006-04-17 오전 9:05:35&nbsp;&nbsp;</SPAN></FONT> </FONT></TD></TR></TBODY></TABLE><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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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height=2><IMG id=userImg8278514 style="CURSOR: pointer" src="http://blogfiles6.naver.net/data19/2006/4/17/277/1-inex1.jpg" _onload='setTimeout("resizeImage(8278514)",200)' _onclick="popview(this, '90000003_00000000000000199CB831E6')"></TD></T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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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class=menu><FONT style="FONT-WEIGHT: normal; FONT-SIZE: 9pt; COLOR: #3a6e7c; LINE-HEIGHT: 120%; FONT-FAMILY: verdana,굴림; TEXT-DECORATION: none">▲ 피카소(Picasso)의「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ee)」&nbsp;<BR>(왼쪽) 1953년 1월, 일본의 창수사(蒼樹社)에서 펴낸 『세균전흑서(細菌戰黑書)』의 표지 (오른쪽) 피카소(Picasso)의「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ee)」. 2×1.1m, 목판 위에 유화, 1951년작, 파리 피카소미술관 소장 <FONT style="FONT-SIZE: 8pt; COLOR: #959595; LINE-HEIGHT: 120%">ⓒ 창수사(蒼樹社) / 파리 피카소미술관</FONT> </FONT></TD></T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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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height=10></TD></TD></TR></TBODY></TABLE><B>『세균전흑서』의 표지와 김병기의 「피카소와의 결별」</B><BR><BR>한국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인 1953년 1월, 일본의 창수사(蒼樹社)는 피카소(Picasso)의「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ee)」을 표지에 실은 책 한 권을 번역・출판하였다. ‘아메리카군의 세균전쟁’ ‘국제과학위원회보고’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의 제목은『세균전흑서(細菌戰黑書)』였다.<BR><BR>국제과학위원회는『세균전흑서(細菌戰黑書)』에서 1912년 이후 한반도에서 한 번도 발병한 적이 없는 페스트가 발병한 점, 미군 비행기가 떨어뜨린 조개를 먹은 평안도 대동군의 한 산간마을 주민이 콜레라에 걸려 사망한 점, 미군 포로들의 자백 등 미국이 세균전을 벌인 구체적인 증거를 보고했다.<BR><BR>한편 해방 직후 북한의 미술동맹에서 서기장을 역임하다가 월남하여 한국전쟁 당시 국군의 종군화가단 부단장으로 활약했던 김병기는 1954년 4월『문학예술』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해「피카소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BR><BR>“피카소씨여! (…) 당신이 발표하신「조선의 학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 물론 당신의 비설명적인 표현은 지나친 내용의 해석을 허용하지 않을런지도 모르나 총을 겨누는 로봇병사들의 한 그룹과 총을 맞는 벌거숭이 부녀자들의 다른 한 그룹이 무엇을 또한 누구를 의미하고 있는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1945년부터 몇 해를 두고 보아 왔으며, 특히 이번 동란의 격랑 속에서 지칠대로 보아온 한국에서의 학살은 당신의「조선의 학살」과는 정반대의 학살에서 시작했다고 하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BR><BR>미군의 세균전 의혹과 민간인 학살을 평가하는 국제과학위원회와 김병기의 시각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피카소의 작품「한국에서의 학살」에 대해서도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평가를 하고 있다.<BR><BR>그런데 특이하게도 둘 사이에 일치하는 한 가지 의견이 있다. 그것은 바로「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이 의미하는 바는 ‘미군의 세균전과 민간인 학살’이라는 점이다. 다만 한쪽은 그것이 진실이라고 보고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새빨간 거짓말이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 본문 기사 끝 -------------------------------------></FONT></SPAN></TD></TR></TBODY></TABLE><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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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TEXT-ALIGN: justify"><SPAN class=newsbonmun><FONT style="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150%; FONT-STYLE: normal; FONT-FAMILY: 굴림,굴림체; FONT-VARIANT: normal"><!-- 메인 이미지 배치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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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height=2><IMG id=userImg469371 style="CURSOR: pointer" src="http://blogfiles13.naver.net/data17/2006/4/17/76/2-inex1.jpg" _onload='setTimeout("resizeImage(469371)",200)' _onclick="popview(this, '90000003_00000000000000199CB831E6')"></TD></T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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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class=menu><FONT style="FONT-WEIGHT: normal; FONT-SIZE: 9pt; COLOR: #3a6e7c; LINE-HEIGHT: 120%; FONT-FAMILY: verdana,굴림; TEXT-DECORATION: none">▲ 미국 FBI의 ‘피카소 파일’&nbsp;<BR>허버트 미트강은 1990년 11월 10일자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에 미국 FBI가 1944년부터 피카소를 공산주의자와 소련의 첩자로 분류하여 그를 감시해온 사찰문건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FBI 피카소 파일은 일부 중요한 부분이 삭제된 채로 공개되었다. <FONT style="FONT-SIZE: 8pt; COLOR: #959595; LINE-HEIGHT: 120%">ⓒ 미국 FBI</FONT> </FONT></TD></T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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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height=10></TD></TD></TR></TBODY></TABLE><B>반공진영과 좌파진영 모두 외면한「한국에서의 학살」</B><BR><BR>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 공산당은 피카소에게 반미 선전을 위한 작품을 그려줄 것을 부탁하였다. 공산당원이었던 피카소는 1951년 1월 18일에「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ee)」을 완성하였다. 가로 209.5cm, 세로 109.5cm 크기의 목판 위에 유화로 그린 이 그림은 1951년 5월 파리의 살롱 드메(Salon de mai)에서 처음으로 전시되었다. <BR><BR>이 그림이 전시되었을 때, 유럽의 평론가들과 각계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반공진영은 예술성이 약하다는 시비를 걸었고, 프랑스 공산당을 비롯한 좌파진영은 살인자의 실체가 명확하지 않다고 비판하였다.<BR><BR>아마도 피카소의 그림이 구체성을 결여했기 때문에 반공진영과 좌파진영 모두에게 외면당했을 것이다. 사실 피카소는 일생동안 한국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으며, 한국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도 없었다. 다만 피카소는 1949년 4월 파리에서 열린 제1회 평화옹호세계대회에 참가하여 북한의 대표단을 이끌고 온 작가 한설야를 만난 적이 있으며, 보도사진을 통해 한국전쟁을 접했을 뿐이다. <BR><BR>그런데도 피카소가 그린「한국에서의 학살」은 냉전기간 동안 국내에서 금기시되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반공 독재정권은 원작은 말할 것도 없고, 화집의 도판으로도 이 그림을 소개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BR><BR>심지어 1960년대 초반 중앙정보부는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8216;피카소‘라는 상표의 크레용을 &#8216;피닉스&#8217;로 강압적으로 바꾸기도 했다. <BR><BR>독재정권과 정보기관이 이러한 조치를 내린 배경에는 미국 FBI가 1944년부터 피카소를 공산주의자와 소련의 첩자로 분류하여 그를 감시해온 사실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BR><!-- 본문 기사 끝 -------------------------------------></FONT></SPAN></TD></TR></TBODY></TABLE><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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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nbsp;<IMG id=userImg8415805 style="CURSOR: pointer" src="http://blogfiles8.naver.net/data19/2006/4/17/87/3-inex1.jpg" _onload='setTimeout("resizeImage(8415805)",200)' _onclick="popview(this, '90000003_00000000000000199CB831E6')"></TD></T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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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class=menu><FONT style="FONT-WEIGHT: normal; FONT-SIZE: 9pt; COLOR: #3a6e7c; LINE-HEIGHT: 120%; FONT-FAMILY: verdana,굴림; TEXT-DECORATION: none">▲ 브루스 커밍스의『한국전쟁의 기원』표지&nbsp;<BR>(왼쪽/가운데) 미국에서 간행된 원본의 표지에는 전쟁의 포화에 부서진 비행기 잔해가 실려 있다. (왼쪽) 1986년 일월서각에서 번역ㆍ출판한 책의 표지에는 피카소의「한국에서의 학살」이 실려 있다. <FONT style="FONT-SIZE: 8pt; COLOR: #959595; LINE-HEIGHT: 120%">ⓒ 역사비평사 / 일월서각</FONT> </FONT></TD></T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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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height=10></TD></TD></TR></TBODY></TABLE><B>80년대 재발견된 피카소의「한국에서의 학살」</B><BR><BR>정보기관의 검열로 인해 주목받지 못했던 피카소의「한국에서의 학살」은 1980년대 반미․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고조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BR><BR>일월서각은 1986년 브루스 커밍스의『한국전쟁의 기원』을 번역ㆍ출판하면서 피카소의 학살도를 표지에 실었다. 이 책이 1981년 미국에서 간행되었을 때, 이 책의 표지에는 전쟁의 포화를 받고 부서진 비행기 잔해가 실려 있었다.<BR><BR>이후 재미 영문학자 신은철 교수는『월간 다리』(1990년 6월호)에「피카소 한국전쟁 ‘학살도’에 숨은 뜻은」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BR><BR>신 교수는 피카소가 학살도를 그리게 된 동기를 분석하고, 정치적 목적 없이 ‘평화’를 신봉하는 의미에서 그림을 이해할 것을 강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전쟁 당시 유럽 공산당원들이 반미의 용도로 사용한 피카소의 학살도가 5년 후 소련군의 헝가리 침범에 반대하는 포스터로 폴란드에서 널리 사용했다는 것이다. <!-- 본문 기사 끝 -------------------------------------></FONT></SPAN></TD></TR></TBODY></TABLE><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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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TEXT-ALIGN: justify"><SPAN class=newsbonmun><FONT style="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150%; FONT-STYLE: normal; FONT-FAMILY: 굴림,굴림체; FONT-VARIANT: normal"><!-- 메인 이미지 배치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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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height=2><IMG id=userImg3930908 style="CURSOR: pointer" src="http://blogfiles14.naver.net/data19/2006/4/17/205/5-inex1.jpg" _onload='setTimeout("resizeImage(3930908)",200)' _onclick="popview(this, '90000003_00000000000000199CB831E6')"></TD></T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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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class=menu><FONT style="FONT-WEIGHT: normal; FONT-SIZE: 9pt; COLOR: #3a6e7c; LINE-HEIGHT: 120%; FONT-FAMILY: verdana,굴림; TEXT-DECORATION: none">▲ 피카소의「한국에서의 학살」과 미국의 세균전 의혹&nbsp;<BR>(왼쪽) 강정구 교수가 펴낸『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의 표지에 실려 있는 피카소의「한국에서의 학살」(오른쪽) 한국과 중국에서의 세균전 사실에 대한 국제과학조사단의 보고서. 김주환이 편찬한 『미국의 세계전략과 한국전쟁』(청사, 1989)에 번역본이 실려 있다. <FONT style="FONT-SIZE: 8pt; COLOR: #959595; LINE-HEIGHT: 120%">ⓒ 역사비평사 / 청사</FONT> </FONT></TD></T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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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height=10></TD></TD></TR></TBODY></TABLE><B>한겨울에 파리, 벼룩, 진드기가 나타난 까닭</B><BR><BR>1996년 강정구 교수가 펴낸『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의 표지로 채택된 피카소의「한국에서의 학살」은 본격적으로 미군의 세균전 의혹 논란과 결부되었다. 강 교수는 1992년『동국사회연구』창간호와 월간『말』(1992.8)에 발표한「미국의 한국전쟁 세균전 의혹」 에 관한 글을 이 책에 수록하였다. <BR><BR>미군의 세균전 의혹은 1952년 1월 29일 인민군 의무본부위원회 문건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이 문건에서는 “1952년 1월 28일 아침 적기(미군 비행기)가 이천 지역 상공에 나타나 2∼3차례 선회하더니 남쪽 방향으로 날아갔다. (…) 정오가 가까워지면서 안개가 걷혔고 중국군은 적기가 나타난 지역의 여러 곳 눈 위에서 파리, 벼룩, 진드기, 거미 등과 같은 곤충을 발견했다. 14시간동안 이 지역에서 벼룩, 파리, 거미가 발견됐다.”고 주장했다.<BR><BR>곧이어 북한 외무상 박헌영(1952.2.22)과 중국의 외교부장 주은래(1952.3.8)가 미국이 감행한 세균전을 반대하는 항의를 정식으로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75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세계평화회의는 국제과학조사단을 구성하고 중국과 북한에서 미군의 세균전 논란에 대한 현지조사를 벌였다.<BR><BR>그 결과가 바로 1953년 1월 일본의 창수사(蒼樹社)에서 번역・출판한『세균전흑서(細菌戰黑書)』였다. 보고서에서 국제과학위원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대가 세균전을 감행한 자료, 미군의 세균전을 입증하는 곤충학적 자료, 식물병리학적 자료, 세균학적 실험 결과, 각 지역의 사례, 용기 및 폭탄 종류, 체포된 간첩들의 증언, 공군포로들의 진술 등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BR><BR>“북한 및 중국의 국민은 바로 세균무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세균무기는 미군들에 의해 갖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중 몇 개는 제2차 세계대전 시 일본군대가 사용한 것과 같은 방법을 발전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 본문 기사 끝 -------------------------------------></FONT></SPAN></TD></TR></TBODY></TABLE><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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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TEXT-ALIGN: justify"><SPAN class=newsbonmun><FONT style="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150%; FONT-STYLE: normal; FONT-FAMILY: 굴림,굴림체; FONT-VARIANT: normal"><!-- 메인 이미지 배치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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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nbsp;<IMG id=userImg7309327 style="CURSOR: pointer" src="http://blogfiles15.naver.net/data17/2006/4/17/94/6-inex1.jpg" _onload='setTimeout("resizeImage(7309327)",200)' _onclick="popview(this, '90000003_00000000000000199CB831E6')"></TD></T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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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class=menu><FONT style="FONT-WEIGHT: normal; FONT-SIZE: 9pt; COLOR: #3a6e7c; LINE-HEIGHT: 120%; FONT-FAMILY: verdana,굴림; TEXT-DECORATION: none">▲ 끊이지 않는 미국의 세균전 의혹&nbsp;<BR>(왼쪽) 1993년 3월 11일 북송된 인민군 종군기자 출신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노인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세균전을 증언했다. (오른쪽) 한국과 중국에서의 세균전 사실에 대한 국제과학조사단의 보고서를 실은 『미국의 세계전략과 한국전쟁』은 불온서적(금서)이 되었다. <FONT style="FONT-SIZE: 8pt; COLOR: #959595; LINE-HEIGHT: 120%">ⓒ MBC 뉴스 화면 / 청사</FONT> </FONT></TD></TR><br />
<TR><br />
<TD height=10></TD></TD></TR></TBODY></TABLE><B>일단 부인하고 우기고 보는 미국의 철칙</B><BR><BR>그러나 미국은 “과학은 과학으로 입증하거나 부인해야 한다”는 원칙을 부정하고, 이 보고서를 전형적인 공산당의 “터무니없는 선전”이라고 일축하며 정치적 공세로 치부하였다. 미국은 &#8220;결정적인 증거나 거짓말임이 판명되지 않은 경우 우선 부인하고 본다는 철칙(Doctrine of Plausible Denial)&#8221;을 현재까지도 철저히 신봉하고 있다. <BR><BR>미국의 이러한 철칙과 냉전체제 덕분(?)에 세균전 의혹과 민간인 학살 의혹은 오랫동안 진실이 밝혀지지 못했다.<BR><BR>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몇몇 미국의 양심적 지식인들과 언론인들은 미국의 세균전 의혹을 꾸준히 제기했다. 그 중에서 중국에서《China Monthly Review》라는 영자신문을 발행하던 미국인 존 W 파월은 전쟁동안에 세균전을 목격하고 미국에 비판적인 내용을 보도했다가 법원에 제소까지 당하기도 했다.<BR><BR>1956년 파월이 중국에서 돌아오자 미국 정부는 그를 선동죄, 반역죄 등 무려 13가지 혐의로 법원에 제소하였다. 법원에서 파월은 자신의 기사 내용이 거짓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국방부의 기밀문서들을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하자, 법원은 정부에 문서들을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미국정부는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문서를 제출하지 않았고, 오히려 소를 취하해 버리고 말았다. 무려 6년을 끌었던 재판이 싱겁게 끝나버림에 따라 진실은 땅 속에 묻혀버렸다. <BR><BR>한편 북한의 역사책『조선전사』27권을 비롯하여 인민군 종군기자 이인모(1992)와 통일운동가 김세원(1993)의 수기,『미국의 세계전략과 한국전쟁』(청사, 1989) 등에서 미국이 세균전을 감행했다고 증언했지만 서구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nbsp;<br />
<DIV class=autosourcing-stub><br />
<P style="PADDING-RIGHT: 0px; PADDING-LEFT: 0px; FONT-WEIGHT: normal; FONT-SIZE: 12px; PADDING-BOTTOM: 0px; MARGIN: 11px 0px 7px; PADDING-TOP: 0px; FONT-STYLE: normal; FONT-FAMILY: Dotum"><A href="http://blog.naver.com/inex1" target=_blank></A>&nbsp;</P></DIV></FONT></SPAN></TD></TR></TBODY></TABL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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