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줄기세포] 노성일 미즈메디병원 이사장, 중앙일보 인터뷰

[사람 속으로] ‘의료계 풍운아’ 노성일 미즈메디병원 이사장

[중앙일보]
입력 2013.04.20 00:10 / 수정 2013.04.20 00:19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3/04/20/10889658.html?cloc=olink|article|default


“경기고 다닐 때 뒤에서 세 번째 … 난, 남이 안 가는 길만 골라간 변종”




노성일 이사장은 매일 세 번씩 오른쪽 눈에 안약을 넣는다. 앞은 비록 흐릿해도 그는 날마다 새로운 세상을 보는 꿈을 꾼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왼쪽 귀는 다섯 살 때부터 들리지 않았다. 논문에 파묻혀 살다 40대에 왼쪽 눈도 실명했다. 지금은 오른쪽 눈과 귀도 성치 않다. 중·고교 시절 그는 늘 꼴찌였다. 고1 때는 자살까지 시도했다. 마음을 다잡고 의대에 입학해 어렵사리 시험관 아기 시술에 성공했지만 학회에선 이단아·별종 취급만 받았다. 줄기세포는 그에게 아픔이었다. 노성일(61) 미즈메디병원 이사장. 아버지의 후광 속에서 풍족하고 순탄했을 것만 같은 그의 삶은 좌절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러면서도 늘 혁신을 쫓았다. 인생의 고갯길에서 그는 지금 또 하나의 꿈을 꾼다. 세계적인 불임전문병원을 세우는 일이다. 무엇이 그를 이처럼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했을까. 강남미즈메디 6층 다락방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다.

박신홍 기자

- 태어난 곳은 어딘가.

 “거제도다. 아버지가 세브란스 의사셨는데 전쟁 중에 병원이 피란을 갔다. 근데 약사셨던 어머니가 사과궤짝에 옷만 챙겨 지프차 얻어 타고 따라오셨단다. 처녀 혼자 내려왔는데 책임 안 질 수 있나. 1951년 현지에서 결혼했고 이듬해 내가 태어났다.”

 노 이사장의 부친은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이자 제일병원 공동 창업자인 고 노경병 대한병원협회장이다. 부친은 거제도에서 만난 미군 군의관 초청으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서양의 신기술을 국내에 널리 소개해 주목을 받았다. 자궁암 방사선 치료를 처음 도입하고 세브란스 암센터 설립을 주도한 의사도 그였다. 노 이사장은 그런 아버지를 보며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의술을 접했다. “그때는 의사가 참 보기 좋았다. 밤에도 두세 번씩 불려 나가고. 내로라하는 분들이 다 아버지 환자였다. 어린 나에겐 영웅이 따로 없었다.”

 아버지는 장남이 대를 이어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아들은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매일 놀러다니기 바빴다. 초등학교 땐 숙제를 한 번도 안 해갔다. 선생님께 30㎝ 자로 맞으면서도 속으로 계산을 했다. 숙제하는 노력보다 맞고 때우는 게 더 이익이라고, 하하.”

 학창 시절 그가 공부에 흥미를 못 느낀 이유는 또 있었다. “디프테리아를 앓아 왼쪽 귀가 멀었는데 키가 커서 교실 맨 뒤에 앉다 보니 선생님 말씀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 딴 짓만 하게 되고…. 그래도 6학년 때 반짝 초치기해서 경기중에 합격했다. 중학교 성적? 중1 때 420명 중 420등이었다. 중3 올라갈 땐 395등이었고.”

 운 좋게(?) 경기고에 갔지만 여기서도 그의 뒤엔 전교에 두세 명뿐이었다. 사고로 뇌를 다친 학생과 우울증으로 전기 치료를 받던 친구가 ‘경쟁자’였다. “우울증 친구는 지금도 가끔 보는데 진짜 천재다. 학교에선 나와 꼴찌를 다투던 애가 종로학원에서 1등을 하더니 서울대 공대에 들어갔다. 단지 ‘실리 스마일’이었는데 매일 고문하듯 전기충격을 줬던 거다. 얘는 고교 때도 바둑 초단이었다. 어쩌면 천재를 천재로 인정하지 않는 세상이 우리 사회인지도 모른다.”

- 자살도 시도했다던데.

 “고1 수업시간에 트랜지스터를 몰래 듣다가 이어폰 잭이 빠져버렸다. 담임 선생님께 압수당했는데 자꾸 부모님을 모셔오라는 거다. 날 야단치면 되는데 왜 부모를 끌어들이느냐며 한 달을 싸웠다. 급기야 선생님은 부모님 안 모셔올 거면 학교를 떠나라고 했다. 더 이상 탈출구가 없었다. 그래서 하굣길에 종로5가 약국에서 수면제를 조금씩 사 모았다. 죽어야 이 곤경에서 빠져나갈 수 있겠다 싶었다. 지금도 왕따 학생이 자살하는 건 탈출구가 없어서다. 어머니가 열쇠로 방문 따고 들어와 병원에서 위 세척한 뒤 겨우 살렸다. 그 뒤론 부모님도 나를 그냥 놔뒀다. 학교 안 가도, 담배를 피워도 야단 안 치시고.”

 - 놀면서 뭐했나.

 “하루는 아버지가 뭐하고 싶으냐길래 장사하고 싶다고 했더니 친척이 있는 남대문시장에 보내주셨다. 그런데 한 평짜리 가게에 구멍탄 피워놓고 온종일 작대기로 올리고 내리고 하는 걸 보면서 ‘이건 아니구나’ 싶어 며칠 만에 그만뒀다. 얼마 뒤 미국에 가는 건 어떻겠느냐고 물으셨다. 아버지가 지금 세계은행 총재인 김용 부친과 친하셨는데 그분 소개로 아이오와주 용이네 바로 옆집에 가게 됐다. 용이는 젊었을 적 설악산도 같이 다니며 친했다. 그래서 여권 수속까지 다 마쳤는데 1968년 1월 김신조 사태와 푸에블로호 사건이 잇따라 터지면서 유학생 전면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별수 없이 다시 1학년으로 복학했고, 결국 고교를 4년 다니게 됐다.”

 초6, 중3에 이어 고3 때의 세 번째 벼락치기로 연세대 의대에 합격한 그는 본과 1학년 때 무의촌 의료봉사를 가면서 ‘문제아’ 인생에 일대 전기를 맞게 된다. “4학년 형들이 청진기 들고 처방을 내리는 모습이 충격적이었다. 나도 불과 2~3년 뒤엔 저래야 하는데 아는 게 없었다. 변호사는 법전이라도 찾아볼 수 있지만 병은 즉석에서 판단을 내려야 했다. 나처럼 준비 없이 의사가 됐다간 하얀 가운 입은 살인기계가 될 수도 있겠구나…. 겁이 났다.”

 이후 그는 난생처음 ‘닥공(닥치고 공부)’ 모드에 돌입했다. 도서관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공부는 결코 쉽지 않았다. “처음엔 정말 5분 만에 일어났다. 도무지 집중이 안 됐다. 그래도 ‘제대로 된 의사가 돼야 한다’는 목표를 갖고 버텼다. 5분이 10분이 되고 30분이 되면서 나중엔 잠 안 자고 책을 보게 됐다.” 그는 이때 많은 걸 깨달았다고 했다. 산 타는 것도 처음엔 힘들지만 나중엔 날아다니게 되듯 처음 습관 붙이기가 어렵지, 한 발짝 한 발짝 1인치씩 나아가면 된다는 것을. 중·고교 때처럼 노력 안 하면 꼴찌가 되고 노력하면 그만큼 얻어진다는 것을. 시험관 아기에 대한 도전도 그렇게 시작됐다.

 - 시험관 아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아버지가 늘 말씀하셨다. 시험관 아기는 서구에서 달나라 못지않은 신대륙이라고. 째고 꿰매는 것만 알던 산부인과 의사였지만 도전해볼 만하겠다 싶었다. 기초부터 다시 시작했다. 유학도 미국에서 처음 시험관 아기에 성공한 오하이오주립대로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섬광이 비치면서 득도한 듯 희열이 느껴지더라. 내분비 생리에 대한 완벽한 이해구조가 자리 잡게 된 거다. 남들은 다 중도에 포기했지만 끝까지 노력하니 길이 보였다.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 ‘아, 저건 나도 생각했던 것’이라고 누구든 얘기할 순 있다.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개원 초기엔 환자 두 명 온 날도

 한국에 돌아온 그는 아버지 병원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2년 만에 독립했다. 더 이상 말썽꾸러기가 아님을 실증해 보이고 싶었다. 아버지는 가업은 안 잇고 어디 돈 벌러 나가느냐며 부자의 연을 끊자고 했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었다. 석 달 뒤 저녁을 먹으러 오라는 전화에 노 이사장은 “저를 한번만 믿어달라”고 간청했고, 아버지는 종잣돈을 내어주며 아들을 감싸안았다.

 - 처음에 환자는 좀 왔나.

 “웬걸. 두 명 온 날도 있었다. 그냥 이불 뒤집어쓰고 잤다. 죽고만 싶었다. 나가서 잡아올 수도 없고. 다행히 시험관 아기 성공 소식이 신문에 나면서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결국 병원은 마우스 투 마우스다. 누군가 효험을 봐야 주변 사람이 오는 거다. 자기 몸 함부로 맡기는 사람 없다. 성형외과도 친구 쌍꺼풀 보고 가지 인터넷 보고 찾지 않는다.”

 2년 뒤인 1993년 그는 지금의 대치동 자리로 병원을 옮기며 또다시 파격을 선보였다. 인테리어를 호텔식으로 꾸미고 대기환자들에겐 원두커피를 내놨다. 화장실 청결을 위해 수챗구멍도 없앴다. 그 덕분에(?) 병원 인테리어 비용만 높인 주범이란 거센 비난도 들었다.

 - 무슨 생각에 그리 했나.

 “미국 유학 가서 처음 들른 곳이 UCLA 병원이었는데 환자들로 북적대야 할 로비가 조용하기만 했다. 으레 1층에 있어야 할 대기실은 각 층에 흩어져 있었다. 고정관념이 깨진 거다. 충격이었다. 왜 우리는 모든 병원이 서울역처럼 해놓고 있나 싶더라. 그래서 나도 다 바꿔봤다. 1층 대합실을 없애고 대신 팬시하게 정원을 꾸몄다. 발레파킹도 해줬고 의사들은 친절로 신뢰를 쌓게 했다. 생각해봐라. 작은 병원에 특징이 없으면 누가 찾겠나.”

 - 학회에서도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던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르신이 발표하면 코멘트 안 하는 게 전통이지 않나. 그런데 30대 후반의 젊은 의사가 질문을 퍼부으니 ‘쟤 누구냐. 저렇게 건방진 놈이 어딨나’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미국은 전혀 다르다. 아니다 싶으면 쌍권총 들고 나와 끝까지 논쟁한다. 그렇게 1년쯤 하니까 그새 유명해져 있더라(웃음). 그런 게 다 혁신의 과정 아니겠나. 병원 서비스 개선한 것도 말들이 많았지만 결국 국민이 제 편을 들어주지 않았나. 저를 비난하던 의사들도 다 따라오지 않았나.”

 그의 말대로 미즈메디병원은 승승장구했다. 병원 최초로 모든 경영을 투명하게 공개해 화제를 모았다. 2007년엔 국세청으로부터 5년간 재무상 누락이 제로임을 인증받았다. 지난해엔 국내 여성전문병원 최초로 JCI(국제의료기관평가위원회) 인증도 획득했다.

지금은 연 1000여 건의 시험관 아기 시술과 50%가 넘는 높은 임신 성공률을 자랑한다. 전문의 90여 명에 외래환자는 연 50만 명에 달한다. 해외환자도 줄을 잇고 있다. 미국·유럽 교포들은 물론 러시아·몽골·베트남에서도 불임환자들이 지난해에만 3200명이나 찾았다. 임신 성공률은 선진국과 비슷하면서도 비용은 미국의 3분의 1 수준인 데다 착상 전 유전진단 등 각종 첨단의술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면서다.

 - 장남이면 보수적이기 쉬운데 늘 도전하고 문제 일으키며 살았다. 천성이 그런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등·하굣길에 막힌 골목을 다 들어가봤다. 어느 게 지름길인지,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 실수도 하고 불필요한 일도 해야 더 많은 걸 깨닫게 되는 것 아닌가. 이병철 회장도 ‘무한탐구’라는 휘호를 남겼는데, 그분이 왜 성공했겠나. 무한탐구 정신 아니었겠나. 휴가 때 대기업 회장이 본다는 책도 다 찾아 읽었다. 사람이 남을 비평하는 데만 힘을 쏟지만 남에게 배우는 게 더 중요한 법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도 그랬잖나. 무학에, 가난하고, 계속 배우는 게 3가지 축복이라고. 음…, 돌이켜보면 난 늘 혁신을 추구하는 변종이었다.”

 실제로 그는 2010년 『1인치의 혁신』이란 책을 펴냈다. 왼쪽 눈과 귀에 이어 녹내장에 오른쪽 눈도 가물가물해지고 오른쪽 귀도 보청기 신세를 지게 되면서 ‘암흑과 적막이 다가오기 전에’ 그간의 삶에서 얻은 경험과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단다.

 - 혁신은 크게 바꾸는 건가, 작은 데서 오는 건가.

 “혁신의 기본은 통째로, 크게 생각하는 게 맞다. 스티브 잡스의 휴대전화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걸 달성하려면 정말 1인치씩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영화 ‘애니 기븐 선데이’를 보면 미식축구에서 공을 잡는 선수는 1인치 더 손을 뻗는 자다. 거기서 승패가 갈린다. 일본이 부품 분야에서 훨씬 앞서 있다고 자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겠나. 잡스도 꼼꼼함과 섬세함으로 승부했다. 시험관 아기도 마찬가지다. 조그만 에러도 용서치 않는다. 나도 엄청 덜렁이었는데 불임부부들을 생각하면 꼼꼼해질 수밖에 없었다.”

- 젊은 불임 부부들이 늘어나는 추세인데.

 “여성이 37세가 넘으면 수태 능력이 급격히 떨어지는데 경제적 자립부터 챙기다 보니 아이 갖는 나이가 점점 늦어져 걱정이다. 직장도 중요하지만 아기가 우선 아니겠나. 적어도 35세 전에 시도해야 성공 확률이 높다.”

왼쪽 눈 실명, 골프 칠 때 캐디에게 방향 물어

 이쯤 해서 황우석 사태 얘길 꺼냈다. 잠시 숨을 고르던 그는 언젠간 꼭 해명하고 싶었다고 했다.

 - 이사장은 공범이었나, 아니면 피해자였나.

 “공범은 절대 아니었다. 난 문제가 불거지기 1년 전부터 황우석을 만나지 않았다. 인간관계를 끊었던 거다. 성공하기 전엔 ‘형님’ 하며 도와달래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는데 유명해지니까 교만해지더라. 그래서 내가 주의를 줬다. 말이 너무 앞선다고.”

 - 당시 이사장도 논란의 한복판에 섰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난자 채취에 대해선 내가 책임을 져야 했다. 하지만 윤리적으로 좀 논란이 되더라도 싱싱한 난자가 아니면 영원히 연구를 못하고 생명을 구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인류 전체의 복지를 위해 참고 가기로 했다. 딴 길은 없었고, 외통수 길이었다.”

 - 후회는 안 하나.

 "그런 결정에 후회는 없다. 문제는 황우석이 원하는 결과가 안 나왔다고 결과를 조작한 데서 생긴 거다. 쓸모없는 거라 했더니 ‘쓸모 있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묻더라. 그래서 이러저러해서 안 되는 거라 했는데 그걸 다 거꾸로 고쳐서 논문을 내더라. 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방법이 옳아야 한다.”

 - 그래도 윤리적인 문제는 남지 않나. 100% 올바른 방법은 아니었지 않나.

 “당시 난자 공여자에게 150만원을 준 게 문제가 됐는데, 2008년 생명윤리법이 개정되면서 실비 보상액이 정확히 150만원까지 합법화됐다. 그때는 법으로 인준되지 않았던 것뿐이다. 나는 연구비 횡령 등 다른 부정엔 전혀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검찰 수사에서도 모두 무죄였다. 단지 참고인이었고 피의자가 돼본 적도 없다. 이런 게 다 검찰 백서에 나왔지만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난 억울하고, 피해자다. 국민들은 아직도 클리어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의사들은 정직했다고 인정해준다. …이게 다 업보 아니겠나.”





노성일 이사장은 “나는 어렸을 적부터 문제아였지만, 1인치씩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두 귀는 들리지 않아도 내겐 과분한 삶이었다”고 했다.

 -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전망은.

 “매우 중요한 연구과제인 건 맞는데 실용성 면에서는 아직 적잖은 과제를 안고 있다. 요원하다는 느낌도 들고. 문제는 효능이 전혀 검증되지 않은 줄기세포 치료법이 횡행한다는 거다. 줄기세포를 키운 물을 화장품에 섞었다니까 시민들은 굉장히 좋은 줄 알고 몇십만원씩 주고 사게 되는데, 이게 몇십 년 전 장바닥 약장사와 뭐가 다른가. 그때 수법 그대로 아닌가.”

 상처는 깊었지만 그는 거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세계가 인정하는 불임 클리닉을 만들겠다는 또 다른 목표를 세웠다. 미국·유럽·일본의 이름난 병원들도 두루 둘러봤다. 그들 병원과 결코 같지 않으면서도 더욱 독창적인 병원을 선보이기 위해서다. 하지만 아직은 ‘현재 유보형’이다.

 “강서에 땅도 사놓고 ‘꿈의 병원’ 모델하우스 모형까지 만들어놨다. 그런데 현실의 벽이 만만찮더라. 한국에서 연구 중심 병원은 사실상 대학만 가능한 구조다. 재량권도 없다. 무엇보다 사람이 확보돼야 하는데 쉽지 않다. 혁신적 사고, 사회에 기여하고 헌신하려는 정신, 밤을 새워 세계 제일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요즘 젊은 의사들에겐 결여돼 있다. 어머니가 제게 해준 말이 있다. 돈은 쫓으면 도망가고 안 쫓으면 따라온다고. 돈은 좀 덜 벌더라도 목숨 걸고 해보겠다는 젊은 의사가 있으면 얼마든지 서포트할 거다.”

 - 그래도 CEO로 나름 성공했는데 비결이 뭔가.

 “간단하다. 투명하면 된다. 워런 버핏도 정직·성실·열정·지식이 열쇠라고 하지 않았나. 병원 회계를 모두 공개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정직이 없으면 신뢰가 생기지 않는다. 직원이 회장을 불신하면 그 회사는 망한다.”

 그의 장남도 산부인과 의사다.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셈이다. 차남은 병원 경영수업 중이다.

 - 얼마 전 손주를 봤다던데.

 “명색이 산부인과 의사인데 예전엔 아기가 이렇게 소중한 줄 미처 몰랐다. 할아버지 눈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아이는 모두 그 집안의 축복으로 보인다. 아들과 손주는 너무 달랐다. 아들은 책임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손주는 그냥 사랑으로만 대하게 되더라. 모든 걸 다 해주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 시험관 아기는 오죽하겠나.”

 - 지난 삶에 만족하나. 행복했다고 생각하나.

 “행복이라…. 부친이 70세 생신 때 가족들 다 모인 데서 말씀하셨다. ‘여러분, 행복하십시오. 그러려면 노력하십시오’. 행복은 절로 찾아오는 게 아니다. 베풀고, 주변에도 잘하고, 애를 써야 한다. 내가 오늘 외로우면 먼저 전화하면 되는 거다. 나는 이젠 앞에서 손이 움직이는 것도 안 보인다. TV가 꺼진 느낌이다. 그래도 난 골프를 즐긴다. 스윙한 뒤엔 공은 안 보고 캐디를 보며 묻는다. 왼쪽으로 갔는지, 오른쪽으로 갔는지. 예전에 예일대생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3%가 구체적인 꿈을, 8%가 막연한 꿈을 갖고 있었고 나머지는 꿈이 없다고 했단다. 그런데 20년 뒤에 보니까 3%가 모든 재화의 90%를 갖고 있었단다. 난 꿈이 있어서 행복했던 것 같다.”

 - 앞으로의 계획은.

“브라이언 다이슨 전 코카콜라 회장이 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과거는 역사고, 내일은 아무도 알 수 없으며, 오늘은 선물이라고. 현재가 곧 선물(present)이라고. 능력에 비해 과분한 삶을 산 데 감사할 뿐이다. 미래는? 지금까지 사이언스의 세계에 살았다면 앞으론 사진 찍고 그림도 그리며 조금은 아트적인 삶을 살고 싶다. 피카소가 그랬단다. 아트는 고상한 게 아니고, 만약 고상하면 그건 아트가 아니라고. 인생도 그런 것 아니겠나. 엉뚱하고, 기발하고, 호기심 천국 같은 거. 지나고 보니 평생 남이 안 가는 길만 골라간 것 같다. 그래도 난 오늘도 혁신을 꿈꾼다. 두 눈·귀 다 성치 않지만(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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