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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감시] 삼성전자 직업성 암 등 피해자 5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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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삼성 백혈병’, 제보만 55명으로 늘어
시사INLive | 장일호 ilhostyle@sisain.co.kr | 입력 2010.06.09 11:47 | 수정 2010.06.22 14:36



전교 10등을 벗어난 본 적이 없는 성적, 재능을 보였던 일본어, 활발한 성격에 리더십이 있어 따르는 친구도 많았던 여고 3학년생 유명화는 꿈이 많고 컸다. 하지만 스물아홉 유명화는 한 달에 한 번 병원에서 혈소판 주사를 맞는 처지가 됐다. 꿈을 빼앗겼다. 지난 9년 명화씨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대전의 한 상업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2000년 7월 명화씨는 삼정전자 온양공장에 입사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던 ‘꿈의 공장’에 취직하며 유씨는 꿈을 키웠다. 가난한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제 손으로 마련한 등록금으로 대학에 가겠다는 꿈, 하고 싶은 공부도 마음껏 하고 멋진 연애도 하겠다는 꿈. 그런 소박한 꿈은 입사한지 1년 4개월 만에 물거품이 됐다.


신입사원 유씨는 ‘중증 재생 불량성 빈혈’에 걸렸다. 유씨는 믿겨지지 않았다.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족력도 없었다. 입사 이후 건강검진에서도 이상 징후를 발견 못했다. 유씨가 처음 찾아간 대학병원에서 담당의사한테 “유전이 아니라면, 환경에 의해 발생했을 가능성도 있다”라고 말을 들었다. 날벼락 같은 질병은 9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완쾌되지 않고 있다. 발병 원인도 이유도 몰라 그저 운이 나빴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달에 한 번, 병원에서 혈소판 주사를 맞고 돌아오는 길이면 유씨는 “차라리 죽고 싶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이름도 생소한 중증 재생 불량성 빈혈은 운 때문에 발병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유씨는 최근 깨달았다. 유씨의 동생 명숙씨(27)가 언니와 같은 온양공장에서 일하다가 급성백혈병으로 숨진 고 박지연씨의 뉴스를 접한 것이다.


유명화씨가 당시 온양공장에서 배치된 라인은 MBT1 라인. 반도체 생산의 거의 마지막 단계로, 반도체 칩을 고온의 설비에 넣어 테스트 하고 통과한 칩을 육안으로 재차 검사해 불량품을 가려내는 일이었다. 기계를 열면 고온의 증기와 함께 고약한 냄새가 올라왔다. 유씨는 아직도 그 불쾌한 냄새가 생생히 기억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게 어떤 화학약품인지, 안전에는 이상이 없는지, 교육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삼성 백혈병’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삼성은 “현장에서 쓰이는 화학물질들은 철저히 관리되어 직원들에게 노출됐을 가능성이 전혀 없고 사내 안전교육을 철저히 했다”라고 해명하지만, 유씨가 회사에서 받아 본 교육은 성희롱 교육이 전부였다. 또 삼성의 해명과 작업 환경은 크게 다르다.


그녀는 성과에 따라 차이가 나는 급여 때문에 늘 동동거리며 뛰어다녀야 했다. 일하던 중 ‘긴급 런’이 들어와 처리 할 때면 수당이 제일 높았다. ‘맨손’의 작업속도가 월등히 빨랐기 때문에 유씨 뿐만이 아니라 동료들 역시 장갑은 잘 끼지 않았다고 했다. 유씨는 “칩이 워낙 작아서 장갑을 끼고는 다루기 힘들었다. 바쁘게 돌아가기 때문에 장갑을 끼면 일의 속도가 나지 않는다. 처음엔 아예 벗고 일했고, 나중에는 손가락 끝 부분만 오려내 끼곤 했다”라고 말했다.


칩을 만진 손가락이 얼굴에 닿으면 유난히 하얗던 피부에 발진이 생기곤 했다. 한창 외모에 관심이 많았던 나이에 생기는 발진은 당시엔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기숙사에서 ‘누가 유산 했다’ ‘누구는 기형아를 낳았다’라는 ‘풍문’이 떠돌았지만,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흉흉한 소문도, 피부발진도, 생리불순도, 난데없이 터지는 코피 보다는 견디기 쉬운 일이었다. 반도체 공정은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계속 돌아가는데, 코피는 유씨의 속도 모르고 한 시간씩 쏟아지기도 했다. “열심히 공부해도 나지 않던 코피였다. 처음에는 너무 열심히 일해서 그런 건 줄 알고 뿌듯하기까지 했다.” 지혈을 하고 돌아와 밀린 일을 처리하면서도 유씨는 연말이면 1000%씩 나오는 수당을 생각하면서 견디고 또 견뎠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의 실핏줄이 터져 눈이 붉어졌다. 안과에서 유씨를 진찰한 의사가 눈이 문제가 아닌 것 같다며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설마했다. 그저 단순한 충혈로만 생각했다. 부랴부랴 찾아간 대학병원에서 유씨에게 내린 진단이 ‘재생 불량성 빈혈’이었다. 입사한지 1년 4개월만인 2001년 11월의 일이었다. 병가를 내고 입원해 1차 약물치료가 시작됐다. 그러나 몸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2차 약물치료도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그러는 사이 상태는 더 악화됐다. ‘중증’이라는 단어가 병명 앞에 붙었다. 약물치료에 실패했으니 이제는 골수이식밖에 답이 없었다. 결국 2003년 2월, 유씨는 소박한 꿈을 키우게 한 ‘꿈의 공장’에서 퇴사했다. 왜 어떻게 무엇 때문에 발병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운이 나빠서라고 생각했다.


연애 한 번 못해보고 지나간 20대



퇴사 이후 가장 잘 한 일은 2004년 그렇게 가보고 싶던 대학 문턱을 잠시나마 밟았던 일이다. 일본어 특기를 살려 한 관광대학에 입학했지만, 계단 오를 힘조차 없어 채 1년을 다니지 못했다. 이후 가까운 곳으로 나가곤 하던 외출도 줄었다. 작은 방에 가만히 누워만 있으면서 성격도 내성적으로 변해갔다.


골수이식마저 쉽지 않았다. 가족 중에도, 국내에도 맞는 사람이 없어 현재 해외에서 알아보는 중이다. 언제 맞는 골수를 찾을지도 모르지만 돈도 만만치 않다. 가족들은 유씨를 위해 밤낮없이 일해 ‘악착같이’ 돈을 모은다고 했다.


50%의 가능성을 위해 골수를 찾고 있는 와중에도 유씨의 건강은 점점 나빠지고만 있다. 항상 부어 있는 몸은 혈소판 주사 때문에 체내에 철분이 쌓이면서 장기 기능도 나빠졌다. 갑자기 쇼크가 오거나,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돌발 상황으로 가족들을 놀라게 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남들처럼…, 연애 한 번 못해봤어요” 유씨는 20대를 아프면서 지냈다.


우연의 일치일까. 삼성 백혈병 문제를 다루고 있는 시민단체 반올림으로 연락 온 한 제보자는 유씨와 같은 라인에서 일했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뇌종양을 앓고 있었다.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박지연씨 사망을 계기로 6월7일까지 반올림에 제보 된 삼성 백혈병·희귀암은 모두 55건. 박지연씨가 숨진 이후 제보 된 것만 30건 가까이 된다. 삼성전자는 지난 4월 삼성 백혈병 논란에 대해 “믿을 수 있는 ‘제3의 컨소시엄’을 구성해 재조사 하겠다”라고 밝혔지만 두 달이 지난 지금도 구체적인 계획은 나오지 않고 있다.
삼성 홍보팀 관계자는 “외부 컨소시엄을 준비하는 데 검토할 것이 많아서 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최근 물밑으로 삼성은 반올림 쪽과 접촉했다. 삼성쪽 관계자가 반올림에 “회사에서는 피해 당사자가 신뢰할만한 기관을 추천하면 조사에 참여하는 게 가능하다고 본다는 입장이다. 반올림이 추천하는 전문가 한두 명 넣겠다”라는 뜻을 전해왔다. 반올림 쪽은 자칫 삼성이 시민단체 쪽 추천인사를 구색 맞추기용 들러리로 세울 가능성이 있어, 공개토론을 먼저 하자고 제안했다.


“삼성이 아닌 다른 회사였다면 어땠을까? 아픈 사람이 50명이 넘게 나왔는데 이렇게 해결을 못했을까? 한 100명 정도 제보자가 나오면 해결 할 수 있을까? 아직 드러나지 않은 환자들이 더 많이 용기를 내줬으면 좋겠다.” 유씨의 동생 명숙씨의 말이다.


장일호 /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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