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반전/평화] 피카소의「한국에서의 학살」과 미군의 세균전 (2)








6.25, 한국은 미-일의 ‘마루타’였다
피카소의「한국에서의 학살」과 미군의 세균전 (2)
출처 : 코리아포커스 , 2006-04-21 오전 9:56:11  


















 
사진 : 첨파파일 1
전단용 폭탄이 세균폭탄으로 개조되어 사용

오랫동안 묻혀 있던 한국전쟁 시기 미국의 세균전에 관한 논란은 동서냉전이 끝난 1998년 무렵 미국 사회에서 되살아났다.

소련의 붕괴 이후 공개된 문서 중에서 ‘세균전 조작설’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발견되자 미국의 보수파 학자들은 중국과 북한이 세균전을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손으로 베낀 소련 문서에는 “국제과학조사단이 조사에 나서기 전에 북한이 시체에 세균을 주입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북한은 “미군이 1952년 북한 지역 400여 군데에 700회 이상 세균탄을 투하해 콜레라, 페스트, 장티프스 등 각종 전염병을 퍼뜨렸다”며 대대적인 반미공세를 폈다.

한편 일단의 학자들에 의해 손으로 베낀 소련문서는 스탈린 사후 소련의 권력 투쟁 와중에 내무장관이었던 베리아가 자신의 정적이었던 외무장관 이그나티에프를 제거해내기 위해 조작한 문서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왜냐하면 소련 문서의 출처와 베껴 쓴 사람이 밝혀지지 않은데다 그 문서의 진본도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1998년 스티븐 앤디컷과 에드워크 해거먼이 20년 동안 미국ㆍ중국ㆍ북한ㆍ캐나다ㆍ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 모은 광범위한 비밀문서와 관련 인물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The United States and Biological Warfare』라는 책을 펴내자 상황이 달라졌다.

이들은 한국전쟁 당시 중국과 북한이 세균 폭탄이라고 공개한 사진의 실체를 공개된 미국의 비밀문서를 통해 밝혀냈다. 미국은 오랫동안 중국과 북한이 공개한 사진을 전단용 폭탄일 뿐이라며, 공산주의자들의 터무니 없는 선전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런데 미국 스스로 “전단용 폭탄이 세균폭탄으로 개조되어 사용됐다”고 기록한 문서를 찾아낸 것이다.














 
사진 : 첨부파일 2
가해자의 기록보다 가치가 없는 피해자의 생생한 목소리

한편 피카소의 그림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충북 영동군 노근리 민간인 학살사건 취재기를 적은『노근리 그 후』(1999)의 표지에도 등장했다. 오연호는『말』지 1994년 7월호에서 노근리 사건을 심층보도했으며, 이 사건은 훗날 AP가 세계적인 특종(?) 보도를 함으로써 유명해졌다.

4ㆍ19혁명 직후인 1960년 12월 27일, 충청남도 경찰국 공보주임과 반공연맹 충남도지부 총무과장을 역임한 정은용 노근리사건 대책위원장은 노근리사건은 전쟁법규위반사건이라며 서울 소재 주한미군 소청사무소 앞으로 손해배상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미국은 오만과 독선으로 진실을 호도했고, 한국의 언론과 군사독재정권은 기독교인이며 반공주의자인 정은용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정은용은 1994년 일흔 셋의 나이에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노근리사건 실록소설을 출판하는 집념을 보였다.

그 결과 역사학자들과 기자들은 미국립문서보관소(NARA)의 문서더미 속에서 노근리 학살사건을 증명하는 미군의 작전기록과 비밀해제 문서를 찾아냈다. AP의 세계적 특종 해프닝은 피해자의 생생한 증언이 가해자의 기록보다도 가치가 없음을 드러낸 현대 역사학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부인하고 본다는 철칙(Doctrine of Plausible Denial)’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미국은 1997년 노근리 생존자와 유족들이 피해배상을 신청하자, 한국 검찰에 “미 제1기병사단이 당시 노근리 지역에 주둔했다는 증거가 없다” 는 뻔뻔스러운 답변서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립문서보관소에는 당시(1950년 7월 26일) 노근리 지역에 미군이 주둔했음을 증명하는 미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제2대대 작전과장 위더스푼 소령이 작성한 부대배치도가 남아 있었다.














 
사진 : 첨부파일 3.
일본군 731부대의 한국전 참전과 미군의 산성동 폭격사건

한국전쟁의 진실을 밝혀내려는 국내외 양심적인 학자들의 연구성과에 힘입어 2000년 6월 도진순 교수는《한국전쟁 50주년 학술심포지엄》에서 “일본이 한국전 당시 미군을 도와 한반도에서 상륙작전과 세균전에 참여”했음을 밝혔으며, 2000년 7월 2일에는 MBC《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일급비밀! 미군의 세균전」을 방영하기도 했다.

미국은 1947년 일본군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중장을 비롯한 부대 관계자들을 모두 전범 기소에서 면제했다. 일본군 731부대는 한국인과 중국인을 ‘마루따’로 생체실험을 한 악마의 부대였다.

이들 731부대 전범들은 한국전쟁 당시 도쿄에 본부를 둔 미군 극동의무사령부 산하 406의무부대 및 8003부대에서 복무했다. 이 부대가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에 쓰인 병원체를 배양했던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일본군은 극비로 세균전 뿐만 아니라 미군의 원산상륙작전과 인천상륙작전에도 참가했으며, 일본의 전범들은 한국전 참전을 계기로 면죄부를 얻고 화려하게 부활했다.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이들은 현재까지도 일본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일본 우익세력의 뿌리가 되었다.

이후 도진순 교수는 안동 MBC 강동규 PD와 함께 미10군단이 1951년 1월 경북 예천군 보문면 산성동의 민간인들을 네이팜탄 등으로 폭격하여 참혹하게 살해한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도 교수는 비밀해제된 당시 미군의 군사작전 명령서를 분석하여 미 공군의 폭격에 의한 산성동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음을 밝혀『역사비평』(2005년 가을)에 발표했다. 이 논문을 통해서 50년이 넘도록 입소문으로만 떠돌던 사건들이 사실(史實)이 되었다.

미군의 3차례에 걸친 폭격으로 134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들은 모두 민간인으로 여자가 80명이었으며, 1차 폭격 당시 정찰기 조종사였던 시몬스는 “적정이 없고 여자와 아이들만 있다”는 이유로 폭격을 거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오폭과 민간인 학살을 인정하지 않고 “산성동 폭격은 정당하다”며 50년 이상 관련 사실을 은폐하였다.














 
사진 : 첨부파일 4
1등 신문(?)《조선일보》의 생뚱맞은 참견

피카소의「한국에서의 학살」에 대한 역사학자와 사회학자의 뜨거운 관심과 비교해볼 때, 정작 미술사학계의 연구는 미비한 형편이다.

미술사학계에서는 서울대 정영목 교수가 거의 유일하게 관련 연구를 했다. 정 교수는 1996년『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8권에 「피카소와 한국전쟁 – ‘한국에서의 학살’ 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고했으며, 2001년에는『조형』24호에 「미술과 정치 : 피카소의 한국전쟁 관련 작품과 한국, 일본의 추상미술, 1950~1960」을 발표했다.

정 교수는 1977년 대학시절 일본에서 보낸『현대세계미술전집』14권 ‘피카소’편에 수록된 「한국에서의 학살」흑백도판이 검열기관에 의해 지워진 채로 우송된 사실과 비밀해제된 미국 FBI 문서를 통하여 피카소가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한 이후 무려 25년 간 소련의 첩자로 분류되어 FBI에 의해서 철저하게 사생활을 감시당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나 그의 논문에 기존의 학계에서 밝혀낸 미군의 세균전이나 민간인학살의 연구 성과를 거의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를 나타냈다.

한편 왜곡・과장・편파보도로 악명이 높은 1등 신문(?)《조선일보》가 생뚱맞게도 정광균의「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을 2002년 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작으로 선정하면서 뒤늦게 이 문제에 개입했다.

외교통상부 퇴직관료 출신인 정씨의 평론은 예전에 발표된 신은철 교수와 정영목 교수의 연구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으며, 문장력 자체도 신춘문예의 미술평론 당선작으로는 함량 미달이 분명해 보인다.

정씨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그는 “일방적이고 균형을 잃은 편견”으로 한국전쟁과 피카소의「한국에서의 학살」을 평가했다. 그는 1950년대 당시 반공진영과 좌파진영이 모두 피카소의 학살도를 미군의 세균전과 민간인 학살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한 사실을 외면했다. 정씨는 50년 가까운 세월동안 한국의 독재정권과 정보기관이 무슨 이유로 검열을 통해 이 그림의 흑백 도판조차 국내반입을 금지했는지에 대해 침묵했다.














 사진 : 첨부파일 5
누가 뼈에 사무치도록 피가 맺힌 억울한 이들의 한(恨)을 풀어줄 것인가?

현재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한국에서의 학살」은 아직까지 한 번도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2004년에 국립현대박물관에서「한국에서의 학살」전시를 추진한다는 발표를 했으나 결국 작품 확보를 하지 못해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한국 언론은 이 작품의 상징적 의미를 둘러싼 이데올로기의 대립만을 중점적으로 부각했다. 이 작품의 창작 배경이 ‘황해도 신천 양민학살사건’과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관심과 신천 양민학살사건을 벌인 주체가 미군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만을 관심에 두었다.

신천학살사건은 해리슨을 중대장으로 하는 미군 1개 중대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이라는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신천지역의 반공청년단에 의해 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방북 경험이 있는 황석영이나 김원일 같은 소설가들도 신천박물관에서 북한의 주장을 확증할 만한 증거를 전혀 찾지 못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피카소의「한국에서의 학살」의 창작배경에는 신천학살사건이라는 하나의 사건뿐만이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세균전과 민간인학살 의혹이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60년이 넘도록 이 작품을 둘러싼 여러가지 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지난 2005년 11월, 국가인권위원회는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사건이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모두 669건이며, 대략 25만∼30만명이 학살된 것으로 파악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아직 보고되지 않은 사건을 고려하면 무려 100만명 가량의 민간인이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확인된 669건 중에서 남한에 의한 학살은 170건이었고, 인민군에 의한 학살은 90건이었다. 그리고 미군에 의한 학살 150건에 달했다.

이러한 과거의 어두운 역사에 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지난해 12월 1일 독립기관으로 출범했다. 현재(2006.3)까지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한 2019건의 사건 중에서 1564건(77.5%)이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 집단학살과 관련이 있다. 신청건수의 통계를 통하여 한국전쟁 관련 피학살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의 피맺힌 억울함이 얼마나 뼈에 사무쳤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60년 전 피카소가 억울하게 희생당한 민간인들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학살도를 그렸듯이, 이제는 우리가 인권과 인간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진실규명 작업에 나서야만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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