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반전/평화] 「한국에서의 학살」과 미군의 세균전 (1)








피카소’ 크레용이 ‘피닉스’로 바뀐 까닭
「한국에서의 학살」과 미군의 세균전 (1)
출처 : 코리아포커스 , 2006-04-17 오전 9:05:35  


















 
『세균전흑서』의 표지와 김병기의 「피카소와의 결별」

한국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인 1953년 1월, 일본의 창수사(蒼樹社)는 피카소(Picasso)의「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ee)」을 표지에 실은 책 한 권을 번역・출판하였다. ‘아메리카군의 세균전쟁’ ‘국제과학위원회보고’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의 제목은『세균전흑서(細菌戰黑書)』였다.

국제과학위원회는『세균전흑서(細菌戰黑書)』에서 1912년 이후 한반도에서 한 번도 발병한 적이 없는 페스트가 발병한 점, 미군 비행기가 떨어뜨린 조개를 먹은 평안도 대동군의 한 산간마을 주민이 콜레라에 걸려 사망한 점, 미군 포로들의 자백 등 미국이 세균전을 벌인 구체적인 증거를 보고했다.

한편 해방 직후 북한의 미술동맹에서 서기장을 역임하다가 월남하여 한국전쟁 당시 국군의 종군화가단 부단장으로 활약했던 김병기는 1954년 4월『문학예술』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해「피카소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피카소씨여! (…) 당신이 발표하신「조선의 학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 물론 당신의 비설명적인 표현은 지나친 내용의 해석을 허용하지 않을런지도 모르나 총을 겨누는 로봇병사들의 한 그룹과 총을 맞는 벌거숭이 부녀자들의 다른 한 그룹이 무엇을 또한 누구를 의미하고 있는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1945년부터 몇 해를 두고 보아 왔으며, 특히 이번 동란의 격랑 속에서 지칠대로 보아온 한국에서의 학살은 당신의「조선의 학살」과는 정반대의 학살에서 시작했다고 하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군의 세균전 의혹과 민간인 학살을 평가하는 국제과학위원회와 김병기의 시각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피카소의 작품「한국에서의 학살」에 대해서도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평가를 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둘 사이에 일치하는 한 가지 의견이 있다. 그것은 바로「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이 의미하는 바는 ‘미군의 세균전과 민간인 학살’이라는 점이다. 다만 한쪽은 그것이 진실이라고 보고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새빨간 거짓말이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반공진영과 좌파진영 모두 외면한「한국에서의 학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 공산당은 피카소에게 반미 선전을 위한 작품을 그려줄 것을 부탁하였다. 공산당원이었던 피카소는 1951년 1월 18일에「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ee)」을 완성하였다. 가로 209.5cm, 세로 109.5cm 크기의 목판 위에 유화로 그린 이 그림은 1951년 5월 파리의 살롱 드메(Salon de mai)에서 처음으로 전시되었다.

이 그림이 전시되었을 때, 유럽의 평론가들과 각계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반공진영은 예술성이 약하다는 시비를 걸었고, 프랑스 공산당을 비롯한 좌파진영은 살인자의 실체가 명확하지 않다고 비판하였다.

아마도 피카소의 그림이 구체성을 결여했기 때문에 반공진영과 좌파진영 모두에게 외면당했을 것이다. 사실 피카소는 일생동안 한국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으며, 한국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도 없었다. 다만 피카소는 1949년 4월 파리에서 열린 제1회 평화옹호세계대회에 참가하여 북한의 대표단을 이끌고 온 작가 한설야를 만난 적이 있으며, 보도사진을 통해 한국전쟁을 접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피카소가 그린「한국에서의 학살」은 냉전기간 동안 국내에서 금기시되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반공 독재정권은 원작은 말할 것도 없고, 화집의 도판으로도 이 그림을 소개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심지어 1960년대 초반 중앙정보부는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피카소‘라는 상표의 크레용을 ‘피닉스’로 강압적으로 바꾸기도 했다.

독재정권과 정보기관이 이러한 조치를 내린 배경에는 미국 FBI가 1944년부터 피카소를 공산주의자와 소련의 첩자로 분류하여 그를 감시해온 사실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80년대 재발견된 피카소의「한국에서의 학살」

정보기관의 검열로 인해 주목받지 못했던 피카소의「한국에서의 학살」은 1980년대 반미․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고조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일월서각은 1986년 브루스 커밍스의『한국전쟁의 기원』을 번역ㆍ출판하면서 피카소의 학살도를 표지에 실었다. 이 책이 1981년 미국에서 간행되었을 때, 이 책의 표지에는 전쟁의 포화를 받고 부서진 비행기 잔해가 실려 있었다.

이후 재미 영문학자 신은철 교수는『월간 다리』(1990년 6월호)에「피카소 한국전쟁 ‘학살도’에 숨은 뜻은」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신 교수는 피카소가 학살도를 그리게 된 동기를 분석하고, 정치적 목적 없이 ‘평화’를 신봉하는 의미에서 그림을 이해할 것을 강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전쟁 당시 유럽 공산당원들이 반미의 용도로 사용한 피카소의 학살도가 5년 후 소련군의 헝가리 침범에 반대하는 포스터로 폴란드에서 널리 사용했다는 것이다.














 
한겨울에 파리, 벼룩, 진드기가 나타난 까닭

1996년 강정구 교수가 펴낸『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의 표지로 채택된 피카소의「한국에서의 학살」은 본격적으로 미군의 세균전 의혹 논란과 결부되었다. 강 교수는 1992년『동국사회연구』창간호와 월간『말』(1992.8)에 발표한「미국의 한국전쟁 세균전 의혹」 에 관한 글을 이 책에 수록하였다.

미군의 세균전 의혹은 1952년 1월 29일 인민군 의무본부위원회 문건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이 문건에서는 “1952년 1월 28일 아침 적기(미군 비행기)가 이천 지역 상공에 나타나 2∼3차례 선회하더니 남쪽 방향으로 날아갔다. (…) 정오가 가까워지면서 안개가 걷혔고 중국군은 적기가 나타난 지역의 여러 곳 눈 위에서 파리, 벼룩, 진드기, 거미 등과 같은 곤충을 발견했다. 14시간동안 이 지역에서 벼룩, 파리, 거미가 발견됐다.”고 주장했다.

곧이어 북한 외무상 박헌영(1952.2.22)과 중국의 외교부장 주은래(1952.3.8)가 미국이 감행한 세균전을 반대하는 항의를 정식으로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75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세계평화회의는 국제과학조사단을 구성하고 중국과 북한에서 미군의 세균전 논란에 대한 현지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가 바로 1953년 1월 일본의 창수사(蒼樹社)에서 번역・출판한『세균전흑서(細菌戰黑書)』였다. 보고서에서 국제과학위원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대가 세균전을 감행한 자료, 미군의 세균전을 입증하는 곤충학적 자료, 식물병리학적 자료, 세균학적 실험 결과, 각 지역의 사례, 용기 및 폭탄 종류, 체포된 간첩들의 증언, 공군포로들의 진술 등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북한 및 중국의 국민은 바로 세균무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세균무기는 미군들에 의해 갖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중 몇 개는 제2차 세계대전 시 일본군대가 사용한 것과 같은 방법을 발전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일단 부인하고 우기고 보는 미국의 철칙

그러나 미국은 “과학은 과학으로 입증하거나 부인해야 한다”는 원칙을 부정하고, 이 보고서를 전형적인 공산당의 “터무니없는 선전”이라고 일축하며 정치적 공세로 치부하였다. 미국은 “결정적인 증거나 거짓말임이 판명되지 않은 경우 우선 부인하고 본다는 철칙(Doctrine of Plausible Denial)”을 현재까지도 철저히 신봉하고 있다.

미국의 이러한 철칙과 냉전체제 덕분(?)에 세균전 의혹과 민간인 학살 의혹은 오랫동안 진실이 밝혀지지 못했다.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몇몇 미국의 양심적 지식인들과 언론인들은 미국의 세균전 의혹을 꾸준히 제기했다. 그 중에서 중국에서《China Monthly Review》라는 영자신문을 발행하던 미국인 존 W 파월은 전쟁동안에 세균전을 목격하고 미국에 비판적인 내용을 보도했다가 법원에 제소까지 당하기도 했다.

1956년 파월이 중국에서 돌아오자 미국 정부는 그를 선동죄, 반역죄 등 무려 13가지 혐의로 법원에 제소하였다. 법원에서 파월은 자신의 기사 내용이 거짓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국방부의 기밀문서들을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하자, 법원은 정부에 문서들을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미국정부는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문서를 제출하지 않았고, 오히려 소를 취하해 버리고 말았다. 무려 6년을 끌었던 재판이 싱겁게 끝나버림에 따라 진실은 땅 속에 묻혀버렸다.

한편 북한의 역사책『조선전사』27권을 비롯하여 인민군 종군기자 이인모(1992)와 통일운동가 김세원(1993)의 수기,『미국의 세계전략과 한국전쟁』(청사, 1989) 등에서 미국이 세균전을 감행했다고 증언했지만 서구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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