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우리 모두의 ‘삶’을 위해 낙태죄를 폐지하라!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도입을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이 한 달 만에 23만 명을 넘겼다. 지난 해 한국 갤럽이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18명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을 때에도 이미 응답자의 74%가 ‘필요한 경우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고 답한 바 있다. 낙태죄 폐지 요구는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낙태죄 폐지는 여성의 몸을 인구통제의 도구로 삼아온 역사를 마감해야 한다는 선언이자, 생명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묻기 위한 오랜 고민의 결과이다. 오늘 모인 우리는 더 이상 누군가의 생명이나 삶이 국가에 의해 선별되거나 통제되지 않는 사회를 시작하기 위해, 낙태죄 폐지를 요구한다.

낙태죄 폐지는 ‘생명권 대 선택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낙태죄 폐지의 문제를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선택권’ 문제로 몰아가는 구도에 반대한다. 대신 우리는, 생명에 대한 책임을 여성들에게 전가한 채 생명을 선별하고 삶을 통제해 온 국가를 고발한다. 과거 대한민국 정부는 인구증가 억제를 위한 국가 차원의 가족계획 정책을 시행하면서 한센병 환자들에게 강제 단종 및 낙태 시술을 행했으며, 현행 모자보건법은 여전히 우생학적 조항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국가는 오히려 낙태죄를 유지함으로써 필요에 따라 부담없이 생명에 대한 선별과 통제를 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장애나 질병, 경제 조건, 연령, 혼인 여부 등에 따른 사회적 차별과 성차별은 출산과 양육의 조건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들임에도 이와 같은 사회 조건들을 개선하는 대신 여성에게만 그 선택의 책임을 전가해 온 것이 낙태죄의 실체이다.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선택권은 대립하는 권리가 아니다. 임신 지속 여부에 대한 여성의 판단은 태아가 살아갈 삶의 조건과 동떨어져 있지 않으며, 생명을 선별하고 삶의 조건을 책임지지 않는 사회에서 태아의 생명권을 운운하는 것은 기만이다.

처벌은 여성의 건강을 해치고 임신중단율을 증가시킨다

여성의 건강에 미치는 위험과 임신중단율을 줄여나가기 위해서도 낙태죄는 반드시 폐지되어야 한다. 낙태죄는 임신중단을 예방하기 보다는 여성들을 고비용의 안전하지 못한 시술 환경으로 내몬다. 옷걸이나 초산 등으로 자가 낙태를 시도하거나, 시술 후 후유증이 발생해도 다시 병원을 찾아가지 못해 사망 위험이 증가한다. 한국에서도 2010년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임신중단 시술 병원 고발 이후 시술 비용이 치솟고 원정낙태가 증가했으며, 불법 복제 낙태약 밀반입이 시작되었다. 결국 2012년,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임신 23주째가 되어서야 겨우 어머니와 함께 병원을 찾아간 한 10대 여성이 사망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낙태죄는 여성에게 낙태한 사실을 알리겠다면서 관계유지를 강요하거나 금전적인 요구를 하는 등 협박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100% 효과적인 피임은 존재하지 않고, 사회적 자원과 권력, 섹슈얼리티 위계 차이가 심각한 사회 조건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때문에 임신중단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고 시술이 음성화될수록 임신중단 시기는 늦어지고 그로 인한 위험은 보다 열악한 상황에 있는 여성들이 떠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임신중단율은 더욱 증가한다. 2016년 5월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성들의 피임 접근성이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가난한 국가일수록 임신중단율이 높으며, 합법화 된 지역보다 금지된 지역에서 임신중단율이 더 높다. 낙태죄를 폐지한 국가에서는 사회적 책임을 인지하고 상담, 의료, 교육, 사회보장 등 다양한 영역에서 보다 구체적인 변화를 만들어 나갔다. 낙태죄 폐지는 보다 안전하고 평등한 사회를 위한 기본 조건이다.

낙태죄 폐지, 정부의 결단을 촉구한다.

낙태죄 폐지 청원 이후 많은 이들이 청와대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와중에, 일각에서는 당장 유지나 폐지 여부를 결정하지 말고 공론화를 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우리는 형식적인 공론화를 원치 않는다. 낙태죄를 폐지하고 사회적 책임을 강화해 나가는 것이 모두의 ‘삶’을 위해 더 나은 방법이라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에 낙태죄를 폐지한 전 세계의 수많은 사례들이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여론을 핑계로 공을 떠넘겨 버리는 형식적인 공론화가 아니라, 정부와 국회의 책임 있는 결정이다. 국가가 개인을 인구관리와 성적 통제의 수단으로 삼는 역사는 이제 끝내야 한다.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여성의 몸을 불법화하는 낙태죄를 폐지하고, 장애와 질병에 대한 차별을 조장하는 우생학적 모자보건법 조항을 전면 개정하라.
-성평등 정책과 성교육을 체계적으로 강화하고, 모든 여성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피임기술과 의료시설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라.
-결혼유무, 이주상태, 성적지향 및 성별정체성, 장애와 질병, 경제적 차이와 상관없이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모성을 실천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리를 보장하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라.
-보다 안전한 시술을 위한 의료진 교육과 미프진 사용을 보장하고, 누구나 안전하고 건강하게 임신을 중단할 수 있도록 최선의 의료적 선택지와 의료 환경을 제공하라.

2017년 11월 9일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건강과대안, 불꽃페미액션, 성과재생산포럼, 장애여성공감,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페미당당, 페미몬스터즈,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노동당 성정치위원회, 녹색당 소수자인권특별위원회, 대구퀴어문화축제, 대전 성소수자 인권모임 솔롱고스,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 레주파, 무지개인권연대, 부산 성소수자 인권모임 QIP, 30대 이상 레즈비언 친목모임 그루터기, 성별이분법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모임 ‘여행자’,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성적지향.성별정체성 법정책연구회, (사) 신나는센터, 언니네트워크, 이화 성소수자인권운동모임 변태소녀하늘을날다, 정의당 성소수자 위원회,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차별없는세상을위한기독인연대,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 총 28개 단체)

한국여성단체연합
(경기여성단체연합, 경남여성단체연합, 경남여성회,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기독여민회,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 대구여성회, 대전여민회, 대전여성단체연합, 부산성폭력상담소, 부산여성단체연합, 새움터,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수원여성회, 여성사회교육원, 울산여성회, 전북여성단체연합, 제주여민회, 제주여성인권연대, 젠더정치연구소여.세.연, 천안여성회,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평화를만드는여성회, 포항여성회, 한국성인지예산네트워크,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연구소,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여성장애인연합, 한국여신학자협의회,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한국한부모연합, 함께하는주부모임(7개 지부 28개 회원단체))

건강과대안, 노동건강연대, 노동당, 녹색당, 다른세상을향한연대, 다산인권센터, 문턱없는한의사회, 민주노총 여성위원회,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변화된 미래를 만드는 미혼모협회 인트리, 보건의료학생 매듭, 불꽃페미액션, (사)탁틴내일, 사회변혁노동자당, 사회진보연대, 상상행동 장애와여성 마실, 성과재생산포럼,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여성환경연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장애여성공감,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여성위원회,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젊은보건의료인의공간 다리, 정의당,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페미당당, 페미몬스터즈, 펭귄프로젝트,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행동하는의사회

모낙폐기자회견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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