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응급피임약은 일반의약품으로 전환돼야 한다

여성의 건강권을 제약하지 말라

5월 20일 식품의약품안전처(이하 식약처)는 사전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사후(응급)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분류한 현행안을 그대로 유지하는 결정을 보도자료를 통해 밝혔다. 이는 2012년 사전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사후(응급)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재분류하기로 한 결정을 발표한 후 사회적 논쟁이 발생함에 따라 유예되었던 분류안을 아무 변화 없이 확정한 것이다. 2012년의 논쟁 때 식약처는 3년간 피임약 사용실태와 부작용, 안전성에 대한 조사를 철저히 거쳐 여성의 건강을 고려한 분류안을 제출할 것을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 발표는 대규모의 실태조사 이후에도 오로지 관련 전문직업군 간의 이해관계 갈등을 잠재우기 위해 내린 안일한 결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납득할 수 없는 식약처의 연구보고서 전문 공개를 요구하며 여성의 건강과 권리를 위해 응급피임약의 일반의약품 전환을 촉구한다.

응급피임약 3% 재처방률이 오남용 실태? 식약처는 납득할 수 없는 연구보고서 전체를 공개하라.

지금 식약처는 연구 결과 전체를 공개하지 않은 채 부작용 실태에 대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자의적인 해석만을 고집하고 있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응급피임약의 중대한 부작용 보고 건수는 2013년 4건이었으며 지난 2년간은 한 건도 보고되지 않았다. 이는 응급피임약의 안전성을 재확인하는 결과이다. 그럼에도 식약처는 응급피임약의 중대한 부작용이 “증가하지는 않았지만, 1개월 내 재처방률이 3%에 달해” 오남용과 안전성 우려가 지속된다고 주장했으며, 이를 응급피임약 분류의 주요한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응급피임약의 가장 흔한 부작용 중 하나는 오심과 구토이다. 즉, 약을 복용한 후 갑작스러운 구토감으로 인해 약을 토해버리는 경우가 빈번하며, 이러한 경우 약을 재처방 받아 다시 복용하여야한다. 그렇기에 응급피임약 1개월 내 재처방률 3%를 약물 오남용으로 판단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식약처는 여성들이 응급피임약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근거로 정보 습득 경로와 피임제 인식 조사 결과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가 응급피임약을 실제 처방받아 사용한 여성을 대상으로 한 것인지, 다른 일반 및 전문 의약품에 대한 인식과 비교하여 어떠한 수준인지 등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다른 일반의약품이나 전문의약품에 대한 인식 수준에 비해 응급피임약에 대한 인식 수준이 현저히 낮아서 특별한 관리가 필요한 것인지 의문이다.

식약처는 2012년 재분류 논쟁 시 약속한 부작용 모니터링과 피임제 사용 실태, 인식도 조사 자료와 결과를 전체 공개해야 한다. 국민들은 모호하게 편집된 일부 결과만이 아니라 연구 결과 전체를 확인하고 식약처의 해석과 결론이 타당한 것인지 판단할 권리가 있다.

응급피임약은 ‘응급성’이라는 본래 목적에 충실하도록 일반의약품으로 전환돼야 한다.

응급피임약은 일반의약품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미국소아과협회, 미국산부인과학회, 미국식품의약국, 세계보건기구, 영국산부인과의사회는 모든 여성에게 과거력이나 현재 병력과 관계없이 응급피임약을 처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응급피임약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안정성이 입증되었으며, 해외에서도 상용화하여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하는 추세이다. 응급피임약을 의사의 처방 없이 약국에서 구입하는 것을 규제할 의학적 이유는 없다. 순전히 의학적 견지에서만 보자면 응급피임약은 의사 처방 없이 원하는 이들이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는 약의 범주에 속한다. 정부 당국과 식약처가 진정으로 여성들의 건강을 우려한다면 응급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존치함으로써 접근권을 제한할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 및 철저한 복약안내, 의료의 질 관리에 힘써야 할 것이다.

여성이 피임약을 의사 처방 없이 복용할 수 있는 방안을 더 선호한다는 것은 전세계적으로 일관된 연구 결과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의사 처방을 받는 것은 경제적, 시간적, 심리적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부 국가들은 공공병원 등에서 응급피임약을 무료로 보급하고 있기도 하다. 응급피임약은 성관계 후 복용까지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약의 효과가 급격하게 감소하는 만큼, 빠른 시간 내에 구입하여 복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임신중절이 형법에서 처벌되고 사회경제적 이유가 모자보건법상 임신중절 허용사유가 되지 않는 우리나라의 현실은 실패한 피임과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여성의 선택권을 매우 좁히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응급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유지하는 것은 여성의 재생산건강을 위협하는 방안이다.

‘전문의약품’의 지위 유지는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인가? 의학적 권고와 접근권 요구를 외면한 식약처 결정은 기만이다.

피임약은 누구나 쉽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청소년과 저소득층, 비혼/미혼 여성, 장애여성이나 만성질환을 가진 여성, 결혼이주 여성 등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로 인해 일일이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기 어려운 여성들에게 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정부가 진정 여성들의 건강을 우려한다면 모든 여성들이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고 스스로 임신과 출산에 대한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사전피임약과 응급피임약을 모두 일반의약품으로 허용하여 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 이와 더불어 약제의 특성과 부작용, 개인별 특성에 따른 위험요소 등에 대한 철저한 복약 안내를 의무화하여 여성들이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식약처가 보도자료에서 스스로 밝혔듯이, 그동안 응급피임약이 전문의약품으로서 의사의 처방에 의해서만 사용되었음에도 여성들은 복용법이나 주의사항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또한 정규 피임법에 대한 안내, 피임 이외에 성매개질환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콘돔을 꼭 써야 한다는 등의 성교육에 대한 안내를 받는 경험도 거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간호사에게 처방전만 사서 나온 경험을 보고하는 사례들은 허다하다. ‘전문’의약품에 대한 복약 안내와 정보 공유 부족의 책임은 의료전문직과 관리감독 기관인 식약처, 보건복지부 및 정부에 있다. 지금까지 책임은 방기해 왔으면서 전문의약품 지정으로 그 책임을 모면하려고 하는 정부의 태도는 너무나도 안일하다.

편집된 연구결과가 실린 보도자료를 통해 기습적으로 발표된 식약처의 결정은 식약처가 과연 3년간의 분류 유예 및 연구 기간 동안 여성 건강을 위한 책임을 충분히 이행해왔는지 의문을 품게 한다. 2012년 의약품 재분류안 발표 당시 여러 시민사회단체는 숙려 기간 동안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과 피임교육, 피임약 보험 급여 및 산부인과 진료 문화 개선, 의료인의 젠더 감수성 교육 등의 방안을 진행하라고 상세하게 제언하였다. 그러나 식약처는 이와 같은 제언을 무시한 채 책임을 방기하고 용두사미의 결과만을 내어놓았다. 2012년에 시민사회단체가 우려했던 바가 현실화된 것이다. 식약처의 연구 결과는 응급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유지하는 것이 여성 건강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리는 것이다. 응급피임약은 보호되지 않은 성관계 후 임신을 예방하기 위한 마지막 방법이다. 여성은 그 마지막 기회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 응급피임약의 접근성에 영향을 주는 장벽은 제거되어야 한다.

 2016년 5월 24일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 장애여성공감,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청소년성문화센터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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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보건기구의 1998년 통계에 따르면 23.1%의 응급피임약 복용 여성이 오심을, 5.6%의 여성이 구토를 경험하였고, 2002년 통계에서는 각각 14.3%, 1.4%이 각각의 증상을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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