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일본 최고재판소의 석면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 배상 결정 판결을 보며 든 생각

단체 및 여러 선생님들의 배려와 양해, 그리고 전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회(전일본민이렌)의 지원으로 2014년 9월부터 일본 도쿄에서 5개월간의 안식 휴가를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특별한 활동이나 운동에 참여 없이 신문과 뉴스를 통해 일본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지라, 일본의 노동 운동이나 노동자 건강 운동에 대한 상세한 상황이나 정보를 전달할 수는 없는 처지다. 그래서 신문이나 뉴스에 소개된 일본 운동의 에피소드를 접하며 든 개인적 상념 위주로 독자 편지를 보낸다.

일본에서는 지난 2014년 12월 14일 중의원 해산에 따른 총선이 치러졌다. 내각제라는 정치 제도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일본은 총리가 언제든 중의원(양원제도 하의 하원의원격이다)을 해산하고, 원래 정기적인 총선 일정과 상관없이 총선을 다시 치를 수 있게 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소비세 인상, 환율 정책, 양적 완화를 기반으로 한 ‘아베노믹스’로 인해 실물 경제가 둔화되고 국민들의 반감이 커져 현 여권에 대한 지지율이 하락하자, 아베 총리는 일본 총리의 절대적 권한인 중의원 해산권을 발동해 지난 2014년 11월 21일 중의원을 해산하였다. 임기가 반도 지나지 않은 중의원을 전격 해산함으로써 12월 14일 총선을 다시 치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분분한데, 장기 집권을 꿈꾸는 아베 입장에서는 원래 예정대로 2년 후 총선을 치를 경우 지지율 하락으로 패배가 점쳐지므로, 그나마 지지율이 높은 현재 총선을 치러 자신에 대한 권력 기반을 강화하려 한다는 의견이 많다. 이에 대의명분도 없이 당리당략으로 막대한 예산과 행정력이 필요한 총선을 치르려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결과는 아베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자민당과 공명당의 연합 정권 측은 전체 의석 475석 중 3분의 2(317석) 이상을 확보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아베의 장기 집권은 일본 뿐 아니라 동아시아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 그는 일본 경제를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양적 완화나 환율 정책과 더불어 사회보장 축소, 파견법 개악 등 반노동자적 정책 등을 추진할뿐더러, 평화헌법의 해석 개헌을 통해 군비 증강과 전쟁 참여 등 동아시아의 불안을 가속시키는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경제적 상황에다 오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일본 노동운동 상황이 겹쳐, 일본의 노동 운동 정세는 그리 좋은 듯 하지는 않다. 하지만 아베 총리의 막가파식 정책에 대한 반감도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일본도 비정규직 및 청년 고용 문제가 심각해짐에 따라, 비정규직 및 청년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운동의 활력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필자는 2014년 9월 20일부터 일본 도쿄에 체류하고 있다. 그간 노동 운동 및 노동자 건강 운동 영역에서 몇 가지 인상적인 사건 및 논의가 있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사건이었던 석면 추방 운동과 관련된 단상을 전한다.

일본에서는 2014년 10월 9일, 일본 센난 지역의 석면 피해자에 대해 국가가 배상하라는 최고재판소의 판결이 있었다. 이 판결은 석면 피해자에 대해 국가가 배상 책임이 있다는 결론을 얻은 세계 최초의 판결이다. 그간 석면 피해자는 무과실 원칙에 따라 산재보험이나 환경기금 등에서 보상을 받거나, 석면 기업에게 책임을 물어 손해배상 혹은 법적 화해를 통한 지원금을 받아왔다. 하지만 석면 기업이 그와 같이 노동자나 지역 주민 건강을 착취하도록 방임한 정부의 책임은 면제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판결에서는, 석면의 건강 피해가 광범위하게 알려져 있던 1960년대에 이르도록 일본 정부가 석면 기업의 국소배기장치의 설치를 의무화하지 않은 것에 대해 정부의 배상 책임을 세계 최초로 인정했다. 석면 기업뿐 아니라 정부도 이 문제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법적으로 명확히 인정한 최초의 사례인 것이다.

판결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쉬운 점도 있다. 예를 들어, 이번 판결에서 일본 최고재판소는 1971년 이후부터는 정부가 적절한 대책을 세웠다고 판단하여 1971년 이후 석면에 노출된 피해자들의 정부 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 석면 운동 단체들은 이는 부적절한 판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 등 다른 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논리로 석면 피해자들이 국가에 대해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점은 획기적인 것이다.

평소에도 생각하던 것이지만, 일본의 석면 피해자 운동에서는 배울 것이 많다. 첫째, 운동 주체들이 석면 피해라는 하나의 사안으로 피해자들과 함께 끈질기게 오랜 동안 투쟁한다는 것이다. 일본 석면 추방 운동의 역사는 30년이 넘는다. 30여년간 계속 새로운 과제를 발굴하며 이 영역에서 운동을 일구어 오고 있다. 늘 피해자들과 함께 한다는 점도 인상 깊다. 운동의 여건이 달라서이긴 하겠지만, 한 영역에서 피해자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오랜 동안 활동하는 노동자 건강 운동의 문화가 부족한 한국적 현실에서 일본의 석면 추방 운동은 늘 자극이 된다.

둘째, 그로 인한 것이겠지만, 운동의 저변과 과제를 넓혀간다는 것이다. 일본의 석면 추방 운동 주체들은 피해자들이 나서기까지 앉아서 기다리지 않는다. 석면 피해의 특성상 피해자 본인의 건강 피해가 석면으로 인한 것임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는 점에 착안해, 일본의 운동 주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환자들을 발굴하고, 피해자일 가능성이 많은 이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한편 석면 문제가 일국적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일찍부터 깨달아 국제연대 운동 건설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일본의 석면 추방 운동 세력들은 한국 운동과 연대하려 노력할 뿐만 아니라,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태국 등 현재도 석면을 생산하거나 사용하는 아시아 여러 국가들의 운동과 적극적으로 연대하려 노력하고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일본 석면 추방 운동의 장점은 일본 노동조합운동의 한계로부터 도출된 측면도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다시 말해 일본의 노동자 건강 운동 단체들이 이와 같은 발전 경로를 밟게 된 것은 물론 주체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 구조화된 측면도 있다는 생각인 것이다.

일본의 노동자 건강 운동 영역을 보면, 큰 노동조합 연합단체(렝고, 젠노렌 등)는 연합단체대로, 노동자 건강 운동 단체는 단체대로 특별한 교류 없이 각자의 사업을 진행한다는 인상을 많이 받는다. 이러다보니 노동자 건강 운동 단체 입장에서는 노동조합 운동에 관여할 일이 적어지고 독자적인 활동과 운동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커진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노동조합과 연계를 맺어야 하고, 맺을 수밖에 없는 한국적 상황과는 사뭇 다른 조건인 것이다. 이런 조건과 구조이다보니 일본의 노동자 건강 운동 단체는 노동조합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와짐으로써 적은 역량이지만 이를 특정 영역에 전략적으로 쏟아부을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일본 노동자 건강 운동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노동자 건강 운동의 핵심세력은 노동조합일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노동자 건강 운동의 전략은 노동조합이 물리적 힘과 정치적 능력으로 현장 노동자들의 현장 통제력 및 지배력을 증가시키기 위한 활동을 벌이는 노동운동의 한 영역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노동조합운동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들거나 아예 없다면 그만큼 운동의 의의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점점 더 운동의 성격은 ‘노동운동’이기보다는 ‘건강운동’ 혹은 ‘피해자 운동’의 성격을 띠게 된다. 물론 이런 성격의 운동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운동은 전통적인 노동자 건강 운동과는 목표와 지향, 운동의 경로가 다르기에 별도의 접근 방식과 평가 틀을 가지고 논의해야 한다. 그런데 일본 노동자 건강 운동의 경우, 단체들의 운동은 점점 더 이와 같은 경로를 밟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국의 노동자 건강과 관련된 단체들의 운동은 이런 측면에서 보면 과도기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이 점점 더 일본을 닯아간다면 한국의 노동자 건강 운동 단체들도 일본의 단체들과 같은 방식으로 운동을 모색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국의 노동조합운동과 노동자 건강 운동 상황은 일본과 다르다. 이에 이러한 운동의 역사와 구조를 고려하면서 일본의 노동자 건강 운동 주체들의 헌신성과 끈기 등 일본 노동자 건강 운동의 장점만을 배워, 급격하게 변화하는 한국 상황에 조응하는 운동을 발전시킬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이상윤(건강과대안 연구위원, 노동건강연대 공동대표)

이 글은 노동과건강 2014년 겨울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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