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미국이 받았다는 ‘확실한 쇠고기 약속’

국회에서 한나라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을 비공개로 날치기 처리하던 날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11월17일처럼 을씨년스럽게 추웠다. 이날 날씨는 한·미 FTA의 미래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100년이 넘는 세월의 차이에도 한·미 FTA는 을사늑약과 비슷한 점이 참 많다. 을사늑약의 문구에는 일본이 “한국의 신민과 이익을 보호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1%도 되지 않는 소수 친일파들만 보호를 받았고, 99%의 백성들은 쌀과 소를 빼앗기는 수탈을 당했다. 1910~1920년 38만마리의 한우가 해외로 팔려나갔는데, 그중 75%인 28만마리 이상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일제는 강제공출제가 실시된 1944년의 경우 전체 쌀 생산량의 60%를 빼앗아갔다.



한·미 FTA 위생검역 챕터의 문구만을 보면 쇠고기 수입조건이나 유전자조작 식품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다. 오히려 을사늑약의 문구처럼 “인간·동물 또는 식물의 생명이나 건강을 보호”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어떤가. 광우병으로 수입이 중단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는 한·미 FTA 협상 개시를 위한 4대 선결조건이었다. 또한 촛불로 막아낸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은 미국 의회의 한·미 FTA 비준을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그뿐 아니라 유전자 변형생물체(LMO)와 섬유분야 원산지 규정을 서로 맞바꾸는 협상이 비밀리에 진행된 사실이 정부의 대외비 문건을 통해 확인되기도 했다. 이런데도 정부는 여전히 “한·미 FTA와 쇠고기, GMO는 무관하다”는 거짓말로 국민을 속이고 있다.



농축산물을 수탈했던 과거의 을사늑약과 달리 한·미 FTA는 월스트리트저널도 예상한 것처럼 엄청난 양의 미국산 농축산물을 한국으로 수출할 길을 열어주었다. 이제는 쌀이나 쇠고기를 빼앗아가기보다 팔아먹는 것이 더 많은 이윤을 남기는 시대가 되었다. 문제는 안전성이다. 값싼 미국산 농축산물 수입이 늘어날수록 국내 농업과 농민은 쇠락의 길로 내몰릴 것이며, 식품안전과 식량주권은 강 건너 남의 나라 얘기가 되고 말 것이다.



맥스 보커스 상원의원이 지난 10월에 공개한 것처럼 “한·미 FTA가 발효되고 6개월 안에 한국의 쇠고기 시장 개방을 위한 재논의가 있을 것”이다. 미국 정부는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을 미리 요구했다가 자칫 촛불시위가 다시 일어나 한·미 FTA 비준 자체가 무산될 수 있음을 우려했다. 그래서 한·미 FTA 미 의회 비준을 요청하기에 앞서 한국 정부에 30개월 이상 쇠고기 및 내장의 개방 압력을 넣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대신 비준 이후에 한국 정부가 쇠고기 전면개방을 하겠다는 ‘확실한 약속’을 받아두겠다고 장담했다. 



아직까지 ‘확실한 약속’의 내용이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정부는 그러한 약속을 한 바가 없다고 발뺌할 것이 분명하다. 정부는 2008년 촛불시위 당시에도 “한·미 정상회담과 쇠고기 협상은 무관하다”고 거짓말을 했다. 정부의 거짓말은 위키리크스에서 폭로한 주한미대사관의 비밀문서를 통해 진실이 밝혀졌다. 현인택은 2008년 1월17일 버시바우 당시 대사와의 면담에서 “이명박 당선인은 쇠고기 이슈에 대한 정치적 민감성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미국 방문에 앞서 미국산 쇠고기가 한국 시장에 개방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주한미대사가 2008년 3월25일자로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보고한 비밀문서에서도 “한국의 무역팀은 이 대통령 방미까지 미국 측 요구에 맞춰 결과를 발표할 수 있도록 물밑에서 열심히 협상을 하고 있다”고 명시했다. 



일제는 을사늑약 이후 ‘한국 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를 수시로 개최했다. 한·미 FTA에서도 수많은 ‘공동위원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공언한 투자자-국가소송제 재협상도 ‘서비스·투자위원회’에서 다룰 예정이다. 어쩌면 이 위원회에서 쇠고기 전면개방에 관한 ‘확실한 약속’의 진실이 불쑥 드러날 가능성도 있다. 진실이 밝혀지면 ‘을사5적 처단’과 ‘조약 폐기’라는 과거의 주장처럼 국민들의 분노가 들불처럼 일어날 것이다.



박상표(국민건강을위한수의사연대 정책국장/건강과 대안 운영위원)



이 글은 경향신문 2011년 11월 24일자에 기고된 글입니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다음의 HTML 태그와 속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a href="" title=""> <abbr title=""> <acronym title=""> <b> <blockquote cite=""> <cite> <code> <del datetime=""> <em> <i> <q cite=""> <strike> <str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