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주민등록증에 혈액형 넣자고? 궁합 봐주려고?

전자주민증의 혈액형 기입은 위험하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서 정부가 입법 발의한 주민등록법 개정안을 상정할 예정이다. 이 개정안 내용 중 하나는 현재 주민등록증을 IC 칩을 내장한 전자주민증으로 변경하겠다는 것이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 그렇게 한다고 한다. 그런데 행정안전부가 전자주민증이 필요하다고 내세우는 이유 중 하나가 응급 의료 상황시 필요하다는 이유로 혈액형 정보를 넣는다는 것이다.


응급 의료 상황에서 혈액형을 알아야 한다?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이는 의학적으로 불필요한 행위이며 나아가 위험천만한 행위다. 혈액형 정보를 넣는다는 점으로 국민들을 호도하여 ‘전자주민증’의 본질을 희석하려는 행위일 뿐이다.


특히 전자주민증을 추진하는 행정안전부와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은 논외로 하더라도, 야당인 민주당까지도 전자주민증 추진에 대해 ‘전자주민증 문제는 행정안전부와 시민단체가 합의할 일’이라는 식의 방관적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말로는 그럴듯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전자주민증에 기입된 혈액형 정보는 실제 수혈에서는 사실상 사용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위험하기까지 하다. 수혈이 잘못되면 생명이 위험하다. 따라서 아무리 응급 수혈이라 하더라도 혈액형 검사는 수혈 전에 꼭 다시 해야만 한다. 정 시간이 없을 때는 O형 혈액을 먼저 수혈하고 그 사이에 교차 검사(cross match test)를 해야만 한다. 알려진 혈액형만 믿고 수혈을 하는 의사는 없다. 전자주민증에 기재되었건 본인이 기억하고 있건 알려진 혈액형만 믿고 수혈을 하게 될 경우 그 위험성이 오히려 크다.


혈액형은 ABO형 Rh+/-형 외에도 여러 가지 변이형이 존재한다. 개인적으로 특정 항체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ABO/Rh 형이 똑같다 해도 수혈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병원에서 치료 목적으로 수혈을 할 때는 ABO/Rh 혈액형 검사는 기본이며, 이외에도 교차 검사와 항체 선별 검사 등의 여러 가지 검사를 시행한다. 따라서 알려진 혈액형을 정보화한다고 하여 응급 상황이나, 의료 현장에서 유용한 점은 거의 없다.


의학적 자문만을 구했어도 이러한 쉽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혈액형 기재를 내세워 전자주민증을 추진하겠다는 것은 ‘전자주민증’이 유용하다는 점을 응급 의료 상황의 필요성이라는 점을 부각시켜 국민들을 호도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더욱이 ‘전자주민증’은 인권 침해 논란과 비용 효율성 문제 등으로 1996년부터 수차례 논의되었으나, 폐기되었던 정책이다. 이런 정책이 매번 되풀이 되면서 논의되는 상황이 당황스럽다. 지난 여러 차례 논의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전자주민증’에는 총 5000억 원에 가까운 비용이 들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런데 전자주민증 도입의 이득으로 거론되고 있는 위변조 방지, 개인 정보 보호, 인식 오류 방지 등의 이익은 평가된 적도 없다. 정부가 집계한 주민등록증 위변조는 1년에 500건 정도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과연 5000억 원 가까운 국가 예산과 민간 비용을 낭비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결국 카드 및 리더기 제조사 등 전자 업체에 대한 이권 사업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는 것이 ‘전자주민증’이다. 기업의 배를 불리는 이 같은 쓸모없는 사업에 투자할 예산만 절약해도 정부와 한나라당이 돈 타령을 하는 무상 급식 예산으로 충분하다.


나아가 ‘전자주민증’은 개인 정보를 IC 칩에 내장하여 수록하도록 하고 있는데, 개인 정보를 전자 칩에 내장하는 것은 발급부터 이용까지 다양한 수준에서 개인 정보가 유출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신용카드처럼 리더기를 통해 개인 정보가 유출될 수 있다. 또 개인의 각종 정보가 앞으로 법이 바뀜에 따라 더 기록될 수도 있다. 2006년 도입을 논의하다 폐기된 통합신분증 형태의 전자주민카드 도입의 전초 단계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행정안전부는 현재의 주민등록증의 주민등록번호가 전자 칩에 저장되어 겉으로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에 보안상 유리하다고 하지만 이는 눈 가리고 아웅이다. 주민등록번호의 활용이 필요한 각종 관공서, 은행, 컴퓨터 가입, 하다못해 길을 가다 당하는 불심 검문에서까지 전자 칩 속의 주민등록번호를 인식하는 과정이 필요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전자 장비를 이용한 불필요한 정보 인지와 확인 절차가 추가적으로 도입될 것이라는 점은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다. 툭하면 이야기하는 IT 강국의 국민들을 바보 취급하고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해명을 하는지 모르겠다.


사실 주민등록번호는 어느 나라에서도 시행하지 않는 구시대적 정책으로 필요에 의한 사회보장번호 등으로 변경하는 것이 맞다. 이렇게만 해도 생년월일과 같은 기본적인 개인 정보를 번호에 기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성별과 출신 지역도 일부 확인이 가능하다. 주민등록번호는 인터넷 실명제등 논란에서도 드러났듯이 특정인을 인지하는 도구로 그간 사용되면서 수많은 인권 침해 문제점이 들어난 바 있다.


여기에 주민등록증에 필수적인 지문 날인은 대다수 외국에서는 범죄자에게나 적용하는 제도다. 이러한 주민등록증과 주민등록번호는 사실 점진적으로 폐지하는 것이 맞다. 이런 상황에서 거꾸로 생체 정보를 포함한 이러한 정보를 전자 칩에 기록하려는 행위는 주민등록번호와 지문 날인 같은 구태의연한 악습을 기정사실화하고 확대하려는 것일 뿐이다.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알 수 없고, 위험천만한 전자주민증 도입 법안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전자주민증 추진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민주당도 방관자적 입장을 버리고 전자주민증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혀야만 한다. 이제 또 다시 ‘전자’ 주민증을 만들어 혈액형과 지문 등의 생체 정보를 넣고 그 외 개인 정보를 전자 칩에 몰아넣는, 21세기 기술을 활용한 19세기적 발상에 반대해야 하는 것이 지금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정형준(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건강과대안 회원) / 프레시안 3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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