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피임약 재분류 논쟁 후 2년, 전문성의 정치를 넘어

* 젠더와건강팀의 유현미 선생님이 2년전 뜨거웠던 피임약 재분류 논쟁을 지금 다시 짚어봅니다. 당시와 현재, 여전히 우리가 넘어야 할 과제는 무엇일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2년 전인 2012년 6월, 식품의약품안전청(현재 식약처)은 경구용 사전피임약을 일반의약품에서 전문의약품으로, 응급(사후)피임약을 전문의약품에서 일반의약품으로 변경하려는 <의약품 재분류(안) 및 향후계획(이하 <재분류(안)>)>을 발표했다. 이 제안에 의사, 약사, 여성단체, 시민단체, 종교계 등은 다양한 입장을 내놓았으며 첨예한 사회적 논쟁의 장이 열렸다. 먹는 피임약의 안전성, 부작용, 사용실태 등을 둘러싼 수다한 이야기들은 약 3개월 후인 2012년 8월 29일, 식약청의 재분류 보류 결정 이전까지 폭발했다. 식약청은 “그간의 사용관행, 사회·문화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현 분류체계를 유지하되, 피임약 사용실태 및 부작용에 대한 모니터링”을 집중적으로 3년 간 실시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이 모니터링 결과를 토대로 2015년 분류체계를 재검토하기로 했다. 이후, 먹는 피임약을 둘러싼 논쟁은 급속도로 사회적 관심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2014년 현재 식약처는 계획한 모니터링 연구에 돌입했다. 2억 원의 비용이 투입될 예정인 이 연구는 소비자단체의 협조를 얻어 사전피임약의 부작용 발생을 추적 관찰하고, 의약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사후피임약의 부작용을 조사한다고 한다. 또한 사회적 합의 도출을 위한 대국민 설문조사를 병행한다고 한다. 2012년의 논쟁 당시, 먹는 피임약에 관한 기초자료 자체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의식한 결과이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후속 조치에 대한 관심이나 논의는 거의 없는 듯하다. 언론 보도도 드물고 2012년 당시 앞 다투어 의견을 발표하던 단체들의 입장도 알 수 없다. 먹는 피임약의 문제는 정부 부처의 연구 용역사업의 하나로 “의사, 약사 등의 전문가로 자문단을 구성해 연구의 투명성”을 확보하면 되는 문제가 된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정부와 일부 의료전문가의 일로만 맡겨놓아도 될까? 2년 전의 열기에 비해 왜 이렇게 무관심해진 것일까? 여기에서는 2년 전 떠올랐던 사회적 논쟁의 의미와 한계를 되짚어 보면서 그 해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병원이냐 약국이냐, 좁았던 선택지

처음 식약청이 <재분류(안)>의 근거로 삼은 것은 먹는 피임약의 권장복용법을 따랐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한 ‘과학적 판단’과 “의약선진외국”의 분류 기준이었다. 이에 대해 의사단체들은 사전, 사후피임약 모두 부작용가능성이 여성 건강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전문의의 의학적 판단 하에서만, 즉 전문의약품이어야지 의약품의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약사단체와 여성단체, 시민단체는 먹는 피임약의 부작용은 경미하며 약사의 성실한 복약지도로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사전, 사후피임약 모두 일반의약품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맞섰다.

특히 여성단체와 시민단체는 의약품의 부작용과 안전성에 대한 판단만으로 피임약 정책을 결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피임약의 안전성만큼이나 접근성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낙태가 형법상 범죄로 처벌되고 사회경제적 사유가 허용되지 않는 현실에서 여성들이 의도하지 않은 성관계나 실패한 피임에 대해 긴급하게 대응할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하면 안 된다는 것이 이들이 강조한 근거였다. 또한 사전피임약이 전문의약품으로 전환되면 지역별로 편중된 산부인과 시설과 산부인과 이용에 대한 문화적 낙인, 높아지는 의료비 부담으로 여성들의 피임약 접근성이 악화될 것을 우려했다. 이는 피임약 정책의 결정에서 안전성에 대한 과학적, 의학적 판단 뿐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대한 고려가 필요함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런데 이같은 사회적 맥락을 고려한 접근성에의 요청을, 의료전문가들은 전문의약품이냐 일반의약품이냐 라는 의약품 선택의 구도로만 혹은 병원이냐 약국이냐 라는 의료이용의 문제로만 좁혔다. 의사들은 주말에도 외래진료와 분만을 하는 병원이 오히려 약국보다 접근성이 높을 수도 있으며, 공개된 공간인 약국보다 폐쇄된 상담공간이 있는 병원이 사생활에 대한 상담을 필요로 하는 피임약에의 접근성을 보장한다고 주장했다. 약사들은 친밀하고 일상적 공간인 약국이 접근성을 높일 수 있다고 반박했다. 이처럼 점차 ‘접근성’의 의미는 여성들이 약국이든 병원이든 상관없이 편하고 쉽게, 개인 소비자로서 약을 사먹는 편의성 증대의 차원에서 이해되어 갔고 여기에 어떤 전문가와 기관이 적합한지를 따지는 문제로 변해갔다.

이러한 논의 구도를 일종의 전문직 이익집단 간 밥그릇싸움으로 단순화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경쟁을 통해 증대되는 전문가의 역할과 권위에 대한 주장과 인정이다.

여성건강 보호를 위한 전문성의 정치?

역사적으로 한국 여성들의 피임 실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주체는 국가였다. 1962년 시작돼 1996년 종료된 가족계획사업은 인구 억제와 경제발전을 목표로 다양한 피임법을 주도적으로 보급했다. 이러한 흐름 하에서 사전피임약은 1968년 자궁내장치의 부작용에 대한 대체 피임법으로 가족계획사업 내에 도입되었고 사후피임약은 1998년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을 예방하기 위한 정부의 청소년성상담 정책의 일환으로 도입되었었다. 의료전문가들의 역할은 국가 정책의 하부실행자로 그 권위가 그리 크지 못했다.

그런데 1996년 가족계획사업이 종료되면서 피임법의 보급이 병원과 약국이라는 민간을 중심으로 이뤄지게 되었다. 또한 발전하는 의료기술과 산업 속에서 의료전문가들은 내외부적으로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확립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전문화 속에서 먹는 피임약의 문제는 안전성과 접근성을 어떤 전문가가 어떻게 더 잘 보장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된 것이다.

한국의 낙태 논쟁을 다룬 논문(2013)에서 백영경은 여성의 몸에 대한 이슈가 법과 정책을 논의하는 공적인 영역으로 들어오는 순간 곧바로 통계와 객관성처럼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인식 틀을 요구받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전문성의 정치”는 여성의 경험과 입장을 전문가의 권위와 지식으로 제약하면서 하나의 사회문제를 전문가들만의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2년 전의 피임약 재분류 논쟁도 여기에서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2012년의 논쟁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정부, 의사단체, 약사단체, 종교계 할 것 없이 모두 ‘여성들의 건강(권)을 위한다’는 수사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전의 가족계획사업에서 피임, 낙태가 여성의 건강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구 조절과 국가경제발전을 위한 것으로 주로 정당화되었던 것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더 이상 국가와 전문가는 집단의 목표를 위해 여성 개인이 협조하라고 말하기보다는 그녀 개인의 ‘건강’을 위해 자신들이 역할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다고 목소리 높였다. 여성건강은 전문가 집단의 관리에 의해서 ‘보호’되어야 하며 전문가의 판단이 개입되지 않는 접근성 증대는 여성건강을 오히려 저해하기 때문에 최종 권한은 전문가에게 있다는 ‘전문성의 주장’을 펼친 것이다.

 빈약한 “팩트”와 ‘무지하고 문란한’ 여성

전문성 주장의 근거로 전문가들은 먹는 피임약의 부작용에 대한 객관적, 과학적 데이터를 제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해외사례와 연구논문이었고, 한국여성들의 구체적 복용실태와 경로, 이에 따른 부작용이 체계적으로 조사된 바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드러났다. 한국은 피임법 실태가 독자적으로 조사되기보다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전국 출산력 및 가족보건·복지 실태조사>처럼 출산력과 낙태 실태를 조사하는 가운데 부가적으로, 15-44세의 가임기 ‘기혼’여성들로만 한정되어서 이루어져 왔다. 이것을 전체 한국 여성의 피임 실천에 대한 객관적 ‘사실’이라고 볼 수 있을까? 게다가 의사단체가 사후피임약 오남용 실태에 대한 객관적 자료라고 제시하고 다른 단체와 언론에서 수없이 재인용된 “사전피임약 2.8%, 사후피임약 5.6% 복용률”은 김소라의 연구(2013)에 따르면 원출처인 대한산부인과학회 측에 자료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응답만을 받은, 출처와 내용이 불분명한 데이터다. 실태 파악 자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데 부작용과 안전성에 대한 어떤 과학적, 전문적 주장이 가능한지 물었어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전문지식, 소위 “팩트”에 근거했다는 전문성의 주장은 그 자체로 탄탄했다기보다는 비전문가를 만들어 경계 짓고 비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힘을 확보해 나갔다. 재분류 논쟁에서 이 비전문가는 바로 ‘무지한’ 일반 여성, 그 중에서도 특히 ‘문란해질 수 있는’ 미혼과 청소년 여성이었다. 의사단체는 위의 출처가 불분명한 데이터에 근거해 사전피임약보다 2배 정도 높은 사후피임약 복용률이 휴가철과 연말에 미혼여성들이 “즉흥적인 성생활의 일반적인 피임법(대한산부인과의사회, 2012.5.31.보도자료)”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발생한 “오남용”이며 사후피임약이 일반의약품이 되면 “사전피임 소홀로 인한 무책임한 성문화 확산(대한산부인과의사회, 2012. 6.7 보도자료)”이 이뤄지고 여성들이 “낙태와 성병의 위험성에 노출”되어 “여성들을 정상적인 피임으로 보호하지 못(대한산부인과의사회, 2012. 6.7 보도자료)”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한 여성들의 낮은 사전피임약 복용률과 높은 콘돔 사용률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제대로 복용하면 더 효과적이고 안전한 피임법을 모르고, 남성에게 의존하는 모습이라고 해석했다. 이는 최근 20~30대 여성들에게 콘돔 사용이 남성의 피임 책임 수용 및 실천으로 이해되는 현실을 무시하고 피임의 책임을 여전히 여성 개인의 것으로 돌린다. 그런데 이 여성 개인은 무지하고 문란할 수 있기 때문에 전문가의 관리와 보호 하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전문가의 권한이 강조되는 것에 비해 책임의 문제는 자취를 감췄다. 만약 사후피임약이 ‘오남용’되고 있다면 그 일차적 책임은 ‘전문’의약품이기 때문에 처방과 판매를 담당하는 의료‘전문직’에게 있다. 이를 무지하고 성적으로 방종한 여성들의 탓으로 개탄하면서 책임 주체는 슬며시 심판자의 자리로 옮겨갔다.

전문가의 영역을 넘어

여성의 몸과 재생산능력, 성을 둘러싼 이슈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의 각축장이자 여러 의미 부여가 나타날 수 있는 역동적 장이다(김소라, 2013). 따라서 먹는 피임약은 여러 의약품 중 하나일 뿐 아니라 여러 피임법 중 하나로서 당대의 남녀관계와 성문화, 성규범의 영향을 받으며 보건정책이라는 제도적 조건 속에서 위치와 의미가 부여되는 사회적 대상이다. 특히 여성학자와 사회학자들은 90년대까지의 국가 주도의 피임법 보급이 여성들의 몸과 재생산능력을 도구화하고 성과 관련된 이슈(성관계와 피임, 임신, 낙태, 출산 등)를 공론화시키기 보다는 여성 개인이 혼자 알아서 처리하는 문제로 만들었다고 지적해 왔다.

여기에 증가하는 전문성에 대한 주장과 정치는 이전과 다르게 여성건강을 위해 안전성, 접근성을 고려한다고 세련되게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피임약을 전문가의 영역으로 한정하여 자신을 여성건강 보호의 ‘주체’로 만든다. 그리고 여성은 그들의 정책과 실천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2년 전 논쟁에서는 이 전략과 구도 자체에 대한 분석이 이뤄지지는 못했다. 의료전문가들의 전문성 주장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과연 적절한지는 질문에 부쳐지지 않은 것이다.

2년 이후, 지금의 상황도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다. 후속연구와 정책에 대한 무관심, 아래로부터 쉽게 공론화되지 못하는 피임과 낙태에 대한 쟁점들, 여전히 피임에 대한 고민이 얼마나 편하게 피임약을 구매, 소비하는 것으로만 읽히는 단순화된 이해 속에는 전문가 정치가 작동하고 있다.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시민참여 민주주의가 논의되고 있는 것처럼, 여성의 몸에 대한 전문성의 의미와 한계를 되짚어보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는 전문가의 역할이나 이해관계를 배제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전문가의 적절한 역할 수행과 책임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해보자는 제안이다. 이 이야기는 여성 당사자의 몸과 피임에 대한 경험, 인식, 태도, 실천을 기본으로, 전면적으로 고려할 때만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유현미(건강과대안 젠더와건강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책임연구원)

<참고문헌>

김소라(2013), “먹는 피임약 분류를 둘러싼 각계의 갈등과 담론 구조”, 『한국여성학』 29(3), pp.81-113.

백영경(2013), “성적 시민권의 부재와 사회적 고통: 한국의 낙태 논쟁에서 여성 경험의 재현과 전문성의 정치 문제“, 『아시아여성연구』, 52(2), pp.4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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